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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亂中雜錄) : 선술(善述) 산서공(山西公) 조경남(趙慶男)■
[2023-12-28 00:29:39]



■난중잡록(亂中雜錄) : 선술(善述) 산서공(山西公) 조경남(趙慶男)■

●난중잡록 서(亂中雜錄序)

1난중잡록 서(亂中雜錄序)

2난중잡록 서

3난중잡록 자서(自序)

 

●1난중잡록 서(亂中雜錄序)

유서경(柳西坰)의 말에, “역사책에는 감개되고 분통이 터지는 대목이 많다.” 하였는데, 이것은 그저 그림자만 보고 한 말이다. 천년 전의 흥망(興亡)의 자취를 보고도 오히려 불평을 갖게 되는데, 하물며 자기 몸으로 친히 경력하고 자기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이야 그 감개와 분통의 절심함이 어찌 지나간 역사책에 비교가 되겠는가. 그렇다면 산서옹(山西翁)의 이 기록으로 그분의 심회를 가히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문(文)으로는 자료를 널리 모아서 기록하고 할 말을 빠짐없이 다 갖추었으니, 이것이 좌씨(左氏)가 《춘추(春秋)》 경문(經文)에 대하여 전(傳)을 쓰듯이 바로 역사가(歷史家)의 한 체제이며, 그 의(義)로는 천 년 전 불평의 나머지이니, 아! 참으로 흐느낄 만한 일이다. 대개 우리나라 선조조(宣祖朝)와 인조조(仁祖朝)의 시대에 이 천하에 일이 많아서, 크기로는 하늘과 땅이 번복하여 사람의 떳떳이 지킬 인륜이 망하고 끊어졌으며, 적기로는 만백성이 다 죽게 되어 피와 살점이 땅바닥에 깔리게 되었으니, 하늘이여! 밑에 있는 이 백성들을 사랑할진대 어찌하여 화액을 내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대저 사람마다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이것은 다만 이미 그렇게 된 사실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식견이 있는 군자라면 일이 일어나기에 앞서서 느끼는 감격과 분통을 어찌 이미 그렇게 된 일이라고 이르겠는가. 산서옹이 이 시국을 당하여 느낀 것이 몇 가지나 되었는지 알 수는 없겠으나, 그의 잦은 탄식과 비개(悲慨)는 한때 사대부(士大夫)들이 붕당을 나누어서 자기 편만 감싸주려는 데 있었으니, 나는 우선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공의 의사를 밝혀 보려 한다. 그 당시에 천하의 대세가 점차로 암흑으로 치닫는데, 우리 동쪽 나라만이 인의(仁義)를 숭상하는 나라로서 이 위험한 천하 대세의 목구멍 같은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되었으니, 만약 우리 동방(東方) 사람들이 앞을 내다보고 일찍이 대비책을 도모하여 큰 지위에 있는 자나 낮은 지위의 사람들이 마음을 협동하여 밤이나 낮이나 자력을 강화했다면, 《맹자(孟子)》의 이른바 ‘천리의 국토를 가지고서 남을 두려워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한 것이니, 오직 자신의 위태함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천하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을 풀어 흩뜨리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동국(東國)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 사대부들은 동인ㆍ서인ㆍ남인ㆍ북인이니 한 것이 과연 무슨 명목(名目)인가. 창과 칼은 되놈을 무찌르기에 쓰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창을 갈아 가지고는 자기 당을 지키고 다른 편을 치려고만 하였고, 계획과 책략(策略)을 세우는 것은 적을 제어하려는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계획과 책략을 남의 공을 세우는 데 방해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해치려는 데만 쓰려고 하여, 아무리 좋은 말과 깊은 모책(謀策)이라도 좋은 것이 되지 못함은 자기 당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백성을 죽이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일이 죄가 되지 않음은 자기 당에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물의 실정을 보면, 합하면 힘이 강하고 나누어지면 힘이 약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의 의논이 이처럼 네 갈래로 나누어지고 다섯 갈래로 찢어져 있으니, 저 악독한 왜적이 쳐들어 오고 중국이 병난에 피폐되었음을 기다릴 것 없이 약할 대로 약해졌을 것이다. 하물며 원기(元氣)가 벌써 허약하여졌으니 외부의 사기(邪氣)가 침입하여 올 것은 역시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동서로 붕당이 나누어지자 바다 건너 왜적이 밀려들게 되고, 대북(大北)이니 소북(小北)이니 하는 싸움이 벌어지자 북방의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들리게 된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미리 서두르면 자립할 수 있고 미리 서두르지 않으면 실패로 돌아갈 것이니, 아무 준비 없이 창졸에 급한 사변에 부딪친다면 비록 관중(管仲)과 제갈량(諸葛亮) 같은 인재가 있다 해도 손을 묶고 아무런 방책을 쓸 수 없을 것이며, 다만 충성과 신의가 있는 의사(義士)들과 아무런 죄없는 백성들만이 간(肝)과 뇌가 깨어져서 들에 널리고 신성한 국토가 허물어진 빈터로 되는 것이다. 옛날 예(例)로 본다면 진(晉) 나라 왕이보(王夷甫) 따위의 여러 사람이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 아! 슬프다. 크게 간사하고 지극히 악한 자가 항상 있는 것도 아니요, 서로 자기 말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도 일찍이 문장(文章)을 사업으로 삼고 고금의 역사에 통달한 자이니 처음에야 어찌 나라를 그르치기로 스스로 기약하였겠는가. 그도 어찌 자기에게 동조하는 자라서 다 군자가 아닐 것이고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라서 반드시 다 소인(小人)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겠는가. 또 어찌 그가 백성과 나라가 편하면 자기 몸과 집도 편할 것이고 나라가 편치 못하면 이와 반대된다는 진리를 몰랐겠는가마는, 철인(哲人)도 어리석지 않음이 없다는 듯이 서로 함께 와중(渦中)에 빠졌으니 그 병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괴이한 일이라 하겠다. 공은 산야에 있는 한낱 선비라 나라의 정사를 논하는 데 참여할 수는 없었으나, 시국을 근심하고 세속을 민망히 여겨서 마음속에 쌓이고 쌓였었다. 정유년(선조 30년, 1597) 왜란이 다시 일어나자 의병을 불러 모아 몸을 떨치고 나서서 기회를 만들고 편리한 방법을 타서 오히려 여러 번 왜적의 머리를 부수어 죽였으니, 보다 더 크게 뜻을 펴지 못한 것은 의기(義氣)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뒤로 시국의 모든 일은 날로 그르쳐지기만 하여 격렬한 근심과 울분을 호소할 길이 없으므로, 이에 이 기록을 쓰기로 하여 선조대왕(宣祖大王) 임오년(1582)부터 인조(仁祖) 신사년(1641)까지 전후 60년 간의 천재지변과 요괴한 물상, 조정의 상황과 민간의 풍속, 난중의 공문과 의병의 격문서, 변방 이외의 모든 일들을 다 모았는데, 그 중에 혹 소루한 것도 있는 것은 듣고 본 것이 미처 못 미친 때문이지 고의로 빼버린 것은 아니다. 공의 가슴속의 핏덩이는 이 기록에 다 쏟은 것이다. 정진(正鎭)이 약관(弱冠) 시절에 오 충렬(吳忠烈) 공의 유고(遺藁)를 보다가 그 뒤에 기록된 말이 조산서(趙山西)의 〈대방기문(帶方記聞)〉에서 나온 것임을 보고서 처음으로 이 글이 있음을 알았으나 보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그 뒤 30년을 지나서 산서옹의 후손 조병덕(趙炳悳) 군으로부터 이 기록의 반을 얻어서 보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 또 전부를 다 얻어 읽게 되었다. 이로써 나의 숙원(夙願)이 쾌히 이루어진 것이나, 이 책 머리에 서문을 쓴다는 것은 내가 어찌 감히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조 군의 선친이 전에 잘못 알고 서찰을 보내서 부탁한 일이 있었고 지금 와서 조 군이 전의 부탁을 또 다시 청하니, 아! 양세(兩世)를 두고 청하는 것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조 군은 힘쓸지어다. 천 년 뒤의 사람도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니, 이 글이 전하는 날에는 반드시 책을 덮고서 여러 번 탄식할 자가 있으리라.

숭정(崇禎) 후 4번째의 병진년(1856) 동짓날,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은 삼가 쓰노라.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亂中雜錄序

柳西坰言。史書。苦多感憤。此影子語也。千載興亡尙爲之不平。況身親經歷。耳目之所睹記。其感憤之親切。又豈史書比耶。然則山西此錄。翁之心可見已。其文。則廣記備言。若左氏傳經之爲,乃史家之一軆。其義。則千載不平之餘憤。嗚呼欷矣。蓋我宣仁之際天下多事。大者天地飜覆。彝倫斁絶。小者生靈糜爛。血肉塗地。天乎。仁愛下民。胡爲崇降不祥至此極也。夫人痛哭流涕。然此特其已然處。若夫君子先事之感憤。豈已然之謂乎。山西之所感於時事者。未知其有幾件節拍。而歎息悲慨。屢發於一時士夫。分朋護黨。請姑以此一節。明公之意焉。當時天下大勢。駸駸然趣於陸沈。而吾東適以仁義之邦。據大勢之咽喉。苟使吾東之人。遠見而蚤爲之圖。大小協心。夙夜自强。則千里未聞畏人。不惟可以自救自拔。使天下免於被髮左衽。其在吾東歟。其在吾東歟。彼士大夫之東西南北。果何名目也。戈矛。所以殲胡也。吾東。礪戈矛於黨同伐異。籌策。所以制敵也。吾東。運籌策於妨功害能。忠言深謀未爲賢。以其不出吾黨也。戕民病國未爲罪。以其出吾黨也。恒物之情。合則强。分則弱。今國論之四分五裂如此。不待玁狁之匪茹。而中國已疲於兵革矣。況元氣旣虛。則外邪之橫侵。亦次第事。是以東西歧而海寇至。羣北關而朔警急。豫則立。不豫則廢。倉卒事急。管葛束手。徒使忠信義士。無罪之元元。肝腦塗壄草。神州邱墟。王夷甫諸人。安得辭其責乎。嗚呼巨奸。奰慝不常。有發言盈庭者。固嘗業文章通古今。初心豈遽以誤。國自期。豈不知同我者未必皆君子。異我者未必皆小人。豈不知民國安則身家亦安。不安則反是。靡哲不愚。載胥及溺。其病根安在。可謂咄咄怪事矣。公。布衣山野。旣不得參涉國論。傷時愍俗。蓄積有素丁酉之變。唱徒奮挺。設機乘便。猶足以屢碎敵首。其不克大有所伸。非氣義不足而然也。嗣是以往。時事日非。憂憤激烈。控訴靡階。乃述此錄。起宣祖壬午。止

仁廟辛巳。六十年間。天灾物妖。朝象民風。亂中文移尺檄。以及邊外機事。具蒐並畜。其有疏漏處。聞見之未周。非故欲畧之也。公之腔血盡此矣。正鎭。弱冠歲閱吳忠烈遺藁。有後錄一段語。出趙山西帶方記聞。始知有此書。而未之見。後三十年。蒙山西後孫趙君炳惠。示以半部。今又獲全帙焉。夙願始快愜矣。弁卷吾豈敢。趙君先大人。誤以書見托。君又申前請。噫兩世矣。何忍辭。君勉乎哉。千載在後。與我同情。是書之傳。必有掩卷而累欷者矣。

崇禎四丙辰陽復日。幸州奇正鎭。謹書。

ⓒ 한국고전번역원

 

●2난중잡록 서

《산서잡록(山西雜錄)》은 고 진사 선술(善述) 조경남(趙慶男) 공이 지은 것인데 산서는 그의 호다. 그의 선세는 한양(漢陽) 사람으로 판중추를 지낸 조혜(趙惠)의 후손이고, 호조 판서를 지낸 조숭진(趙崇進)의 현손이다. 그의 선고(先考)인 사직(司直)을 지낸 조벽(趙璧)은 남원 양씨(梁氏)와 혼인하였고, 그래서 남원부 동녘에 있는 원천리(元川里)에서 살았는데, 융경(隆慶) 경오년(선조 3년, 1570)에 공을 낳았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총명하여, 겨우 말을 배울 수 있게 되자, 이미,

꽃은 난간 앞에서 웃고 / 花笑檻前

달은 하늘 복판에 다다랐다 / 月到天心

등의 싯구를 외었다. 사직은 그가 유달리 재주 있는 것을 기뻐하여 매우 귀여워했다. 을해년(선조 8년, 1575)에 사직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유모의 등에서 서러워하여 못 견디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했다. 일곱 살에 처음 공부를 시작했는데 한 번 들으면 곧 외고는 했다. 기묘년(선조 12년 1579) 가을에 상사(上舍) 유인옥(柳仁沃)에게 가서 배우면서 비로소 글을 짓게 되었는데 써낸 말이 번번이 사람을 놀라게 하여 상사가 대단히 칭찬해 주었다. 글을 읽는 여가에 나무를 휘어서 활을 만들고 싸리를 잘라서 화살을 만들어서 나갔다 물러났다 껑충껑충 뛰었다 하는 활쏘는 법이 퍽 좋았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데 있어서도 운치가 극히 청초하여 어른들이 감탄하고 다들 선대의 유풍이 있다고 칭찬했다. 임오년(선조15년, 1582)에 공의 나이 13세였는데, 세 해가 함께 솟고 쌍무지개가 세 해를 포개서 꿰뚫은 것을 보고는 세상이 대단히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당시의 일을 기록하게 되었으니, 잡록의 저술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계미년(선조 16년 1583)에 양 부인이 세상을 떠나 공이 부모를 다 잃으니, 외할머니 허씨(許氏)가 다른 자녀가 없어 이때부터 할머니와 손자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살게 되었다. 정해년(선조 20년, 1587)에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을 찿아가 뵙고 도덕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임진년(선조 25년, 1592)에 왜적이 창궐해서 나랏일이 형편없이 되자, 공은 자기가 완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는 것을 믿는지라 의병의 격문이 오면 번번이 떨치고 일어나 먼저 나설 뜻을 가졌으나, 외할머니가 연로하고 의탁할 데가 없는 데다 또 이질을 앓는 일을 생각하여 딱 끊고 가버리기가 어려워 의분을 참고서 그만두었다. 행조(行朝 행궁(行宮)과 같은 뜻으로 임금이 파천해 있는 곳)로부터 스스로 죄책하는 교서가 내리기에 이르러서는 공이 그 교서를 보고 대성 통곡하며 말하기를, “신민(臣民)된 자가 이 교서를 보고도 통곡하지 않는다면 인정이 없는 자다.” 하고, 시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나타냈다. 정유년(선조 30년, 1597) 봄에, 무용(武勇)으로 뽑혀서 군문찬획(軍文贊畫)이 되었으나 마침내는 외할머니의 사정 때문에 사퇴하고 돌아와 노인을 업고 지리산 속으로 피난했다. 매일같이 왜적을 만나서는 힘을 내어 쳐서 쫓으니 산을 뒤지던 왜적들은 감히 항거하지 못했고, 도적질하는 무리들도 두려워하여 감히 함부로 굴지 못했다. 공을 따라다니는 자들이 3백여 명이었는데 하나도 다치거나 없어지지 않았고, 산골짜기에 피해 와 있는 자들도 다 공의 덕으로 온전히 살게 되었다. 그리고는 동지들과 함께 군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여 여러 차례 특출한 공훈을 세웠다. 불우(佛隅)에서 완전히 승리한 것, 궁장(弓藏)에서 모조리 무찌른 싸움, 산골에서 한밤에 공격한 것, 하동(河東)에서 추격하여 적을 벤 것, 죽전(竹田)에서의 기묘한 계략, 숯굴[炭窖]에서의 급박한 추격, 산음(山陰)에서의 화공(火攻), 해현(蟹峴)에서 포위를 뚫은 것 등은 다 그의 전공 중에 뚜렷이 나타난 것들이다. 복수장(復讐將) 정이길(鄭以吉)이 원수(元帥)에게 보고하기를, “조경남은 일개 서생으로 의사들을 모아서 죽음을 같이 하기로 맹서하고 여러 차례 왜적을 섬멸하였으니, 나라를 위한 그의 정성에 대하여 마땅히 빨리 포상을 내리도록 장계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신하된 의리로서 임금을 위해 왜적을 토벌하여 자기의 분을 풀 따름이지, 적을 목 베어 바쳐 포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산과 들을 전전하여 싸워 전후로 왜적을 목 벤 것이 몇 백이나 되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나 종내 일자반급(一資半級)의 상도 없었으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부끄러워한 것이 이러했다. 무술년(선조 31년, 1598)에 외할머니 허씨의 상을 당하여 복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본도(本道)의 병사(兵使) 이광악(李光岳)이 글을 보내 그를 막하로 부르므로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종군하게 되었다. 왜교(倭橋)의 전투에서 도독(都督) 유정(劉綎)의 선봉이 되어 힘을 다해 왜적을 쏘았는데 쏜 화살 치고 명중하지 않은 게 없어 명장(明將) 이유(李兪)가 그를 무척 가상히 여겼다. 부총(副總) 이방춘(李芳春)이 승전이 더디어짐을 근심해서 시를 써서 이 장군에게 보내자 이 장군은 공을 시켜 그 시에 화작하게 하여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 아! 공은 이 싸움에서 나라의 수치를 씻어 자기의 소원을 이룩하기를 바랐으나 하늘은 순(順 역(逆)의 반대)을 돕지 않아 대군은 물러서고 왜적 역시 바다를 건너가버려 마침내 큰 뜻을 이룩하지 못했으니, 이 또한 이광(李廣)의 기구한 운명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경자년(선조 33년, 1600)에 사나운 호랑이가 호령(湖嶺)의 접경을 횡행하며 수백 명의 사람을 물어 죽여서 대낮에 큰 길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자, 이 때문에 방어사(防禦使) 원신(元愼)은 체포되어 심문받기에 이르렀고 신임 방어사 이사명(李思命)이 또 그 호랑이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감히 나서지 못했다. 공이 계략을 내어 쇠뇌틀을 안 보이게 설치해 놓았더니, 호랑이가 과연 쇠뇌에 맞고 달아나서 집 남쪽 산숲으로 들어가 벼랑을 등에 지고 으르렁대는 것이었다. 공은 팔뚝을 걷어부치고 곧장 앞으로 나가 활을 쏘아 관통시켜서 호랑이가 비틀거리다가 죽어 넘어지자, 곧 끌어다가 방어사에게 보내주었다. 방어사가 대단히 기뻐하며 말하기를, “지난날 왜란 때는 나라를 위해 왜적을 섬멸했고, 올해의 호랑이 재앙에는 사람들을 위해 해를 제거했으니 진실로 충의롭고 유공(有功)한 인물이다.” 하고는 그에게 푸짐한 상을 주었으나, 공이 그것을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호랑이 한 마리를 사살한 데 상이 다 뭡니까. 만약 상을 베풀고 싶으시다면 한 면(面)의 전결(田結)에 대한 가수(加數 농지에 부과한 과세)를 감해서 여러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방어사가 말하기를, “그것은 방어사가 멋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못 되오.” 하고는 10석(石)을 감해 주고 그 상까지 내려주었다. 임인년(선조 53년, 1602)에 공의 나이가 서른셋이었는데, “인생 백 년의 3분의 1이 지나갔다.”라는 싯구가 있으니, 이것은 공명은 늦어지고 세월은 흘러감을 개탄한 것이다. 무신년(선조 41년, 1608)에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이 본부 판관이 되어 호곡(虎谷)으로 공을 찾아가 천사대(天使臺)에 앉아 있었는데 유 상사(柳上舍) 등 여러 사람이 다 모여 있었다. 술이 들어오기 전에 큰 노루가 장법산(長法山)에서 논으로 내려오니 학성군이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조형은 늙었다. 만약에 이 노루를 잡는다면 소 동파(蘇東坡)가 적벽(赤壁) 놀이에서 노어(鱸魚)를 얻은 것에 대신은 갈 건데.” 하니, 공이 곧 나장곤(羅將棍 죄인을 문초할 때 때리는 데 쓰는 몽둥이)을 집어들고 대에서 내려가 찾아서 쫓아갔는데 5, 60보도 안 가서 노루가 손아귀에 들어와 산 채로 대 위에 올려보냈다. 학성군은 대단히 기뻐하고 공이 노쇠하지 않은 것을 치하했다. 부사(府使) 성안의(成安義) 공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가 문장의 거벽(巨擘)인 줄만 알았지 짐승을 쫓아가서 잡을 만한 이런 용맹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제의 노루는 문만호(文萬戶)의 호랑이 정도가 아니다.” 하였다. 기유년(광해군 1년 1609)에 향시의 두장[鄕試兩場]에 합격됐으나 예부(禮部)에서 꺾었다. 정사년(광해군 9년 1617)에 또 세 장에 통과했다. 그때 이이첨(李爾瞻)과 허균(許筠)이 나랏일을 맡고 있었는데 공은 정치가 어지럽고 윤리가 없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과거 보는 일을 그만두고 문을 닫고 들어 앉아서 자기 서재에 ‘주몽당(晝夢堂)’이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오직 책만을 낙으로 삼고 살았다. 계해년(인조 1년, 1623)에 하늘이 이 나라를 도와 인조가 반정(反正)하자, 사림(士林) 중에 깊이 숨고 나타나지 않던 자들이 다 갓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彈冠 벼슬하러 나오는 것] 나왔다. 공도 과거에 응시하여 갑자년(인조 2년, 1624)에 진사시에 뽑혔다. 이때부터 그는 오막살이 속에 자취를 감추고 세상에 나설 생각을 끊었으며, 마침내는 방장산(方丈山) 서쪽 용추동(龍湫洞) 속에 별장을 짓고서 유유자적하게 지냈고, ‘산서병옹(山西病翁)’이라 자칭했다. 슬프다! 공은 영특한 자질로 충효 강개한 절개를 지니어 임진왜란 때에는 나라를 근심하고 왜적에 분개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을 흘렸으나, 다만 외할머니의 세상 떠날 날이 멀지 않아서 나라에 몸을 바치지를 못했지마는 그러면서도 충의심을 발휘하여 왜적을 죽였으니 그가 평소에 간직했던 뜻을 대체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충민(李忠愍)이 통제사(統制使)로 큰 공을 세우고는 총탄에 맞아 전사하자 공은 시를 지어 애도했다. 병자년부터 정축년간의 호란(胡亂 1636~1637) 때는 노환이 이미 심해서 국난에 달려갈 희망이 끊어지매 한갓 충의와 의분이 간절했을 뿐이었다. 삼학사(三學士)가 심양(瀋陽)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감개하여 시를 짓기를, “시시(柴市)에서 자신을 희생한 문 승상(文丞相)이요, 연경(燕京)에서 굶어 죽은 사 신천(謝信川)이다.” 하였으니, 그의 충의의 기개는 늙어서도 쇠하지 않았음을 또 알 수 있다. 13살에 태양의 변괴를 우러러 보고는 그 시대가 어지러울 것을 미리 알고 자기의 보고 들은 것에 따라 이러한 집성(集成)을 내놓았으니, 어린 나이에 앞일을 알았다는 것은 더욱 기발하다. 임오년(선조 15년, 1582)부터 시작하여 무인년(인조 16년, 1638)에 끝나는 57년간의 일을 가지고 큰 책 8질(帙)을 저서하여 ‘산서잡록(山西雜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정의 변고, 민생의 희비, 시운의 성쇠, 세도의 오융(汚隆)에 관한 것은 빠짐없이 실었고, 선악과 역순을 가리는 데 엄격했으며, 충신과 절사(節士)의 사적에 관해서는 더욱 충실하게 다뤄서 선한 자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고, 악한 자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하였으니 이 책은 실로 쇠세의 한 귀감으로 세도에 관계되는 바가 크다. 공은 명문의 후예로 남쪽 시골에 밀려 내려와서 불행하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는데도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써 문장은 세상에 알려지고, 지혜와 용맹은 당시에 드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주와 운수가 서로 맞지 않아 뜻을 지닌 채로 세상을 떠났으니 정말 애석하다. 아! 공은 비록 생전에는 불우했으나 다만 이 한 책은 후세에 전해질 수 있으니 불후(不朽)의 작이라 해도 좋다. 지금도 기억하거니와 지난 갑자년(인조 2년, 1624)에 공이 진사시에 급제하고 집에 돌아오자, 내 선친 판서공(判書公)이 당시 장령(掌令)으로 축하연에 초청되었었다. 그런데 이제 공의 손자 선(愃) 군이 그 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책의 보람을 나타내는 글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금년에 81세로서 노환으로 들어 앉아있는 터라 글을 쓸 생각은 없지만, 지난날을 생각하면 감회를 누를 길 없어 감히 늙고 졸렬하다는 이유로 그의 생각을 물리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공의 자서(自敍)를 가지고 거기에다 약간의 산정(刪定)을 가하고 중간에 선배들로부터 전해 들은 것을 덧붙여 한 편의 글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당시 정치인들의 잘잘못과 사세의 완급에 대해서는 이 책을 보는 사람이 으레 알수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다시 늘어놓지 않는다.

숭정 기원 39년 병오년(현종 7년, 1666) 음력 9월 국화 피는 가을에 삭녕인(朔寧人) 최시옹(崔是翁)이 삼가 서문을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亂中雜錄序

山西雜錄者。故進士趙公慶男善述之所作。山西其號也。其先漢陽人。判中樞惠之後。戶曹判書崇進之玄孫也。其考司直璧。娶于南原梁氏。因居于府東元川里。以隆慶庚午生。公。天賦穎悟。纔能學語。已誦花笑檻前。月到天心等句。司直喜其奇俊。撫愛特甚。乙亥。司直歿。公在姆背。悲不自勝。見者爲之感動。七歲始入學。一聞輒誦。己卯秋。就傅于柳上舍仁沃。始有製述而語輒驚人。上舍大加奬許。讀書之暇。揉木爲弓。翦杻爲箭。進退踊躍。射法工妙。詠歌舞蹈。體韻淸絶。父老噓唏。咸稱有先世風。壬午公年十三。見三陽幷出。雙虹疊貫。知世大亂。乃記時事。雜錄之修自此始。癸未。梁夫人歿。公。奄矢怙恃。而外祖母許氏無他子女。自是祖孫二人。更相爲命。丁亥。往謁于重峯趙先生。得聞道德之諷。壬辰。島夷猖蹶。國事罔極。公恃其有膂力善騎射。義檄之來。輒有奮裾先登之志。旋念祖母年老無依。而且病痢。難於絶裾而行。乃含忍而止。及自行朝。有罪己之敎。見而大慟曰。爲臣民者見此敎而不慟哭。則無人心者也。作詩以見志。丁酉春。以勇武被選。爲軍門贊畫。終以祖母情勢辭歸。負老避兵于智異山中。日日遇賊。奮身擊逐。搜山諸賊。莫敢相抗。偸攘之徒。亦畏而不敢恣行。從公者三百餘人。無一傷缺。山谷避竄之人。皆賴而全活。乃與同志聚衆討賊。累立奇勳。佛隅之全勝。▦▦之鏖戰。山洞之夜斫。河東之追斬。竹田之奇計。炭窖之迫逐。山陰之火攻。蟹峴之突圍。皆是戰功之表著者也。復讎將鄭以吉。報於元帥曰。趙慶男。以一書生。募聚義士。誓以同死。累次殲賊。爲國之誠。宜速褒啓云。而公。以爲臣子之義。爲君父討賊。以洩其憤而已。不可以獻鹹要功。雖轉鬪山野。前後斬伐。不知其累百數。而終無一資半級之賞。其恥於自衒如此。戊戌。遭許祖母喪。服未闋。本道兵使李光岳。署致幕下。義不敢辭。遂負羽轅門。倭橋之戰。爲劉都督綎前鋒。竭力射賊。發無不中。天將李兪。甚嘉之。副總李芳春。憂捷遲。題詩送李帥。李帥。使公和之。大得其稱賞焉。嗚呼。公於是役。庶幾雪國恥成己願。而天不助順。大軍左次。賊亦渡海。竟未遂大志。其亦李廣之數奇歟。庚子。有惡虎。橫行湖嶺界。咬殺人數百餘。白晝大道。人不得任意行。防禦使元愼。至被拿鞠。新防禦李思命。又欲措捕而不敢發。公出方略設潛機。虎果中弩。走入家南山藪。負隅咆哮。公。奮臂直前。射而貫之。虎躑躅而斃。卽曳致。防禦大喜曰。昔日倭亂。爲國殲賊。今年虎患。爲人除害。誠忠義有功之人也。乃重賞之。公。辭曰。射殺一虎。何賞之有。如欲施賞。願減一面田結之加數。以惠衆人。防禦曰。此非防禦所可擅便。乃減十石。幷其賞賜之。壬寅。公年三十三。有百歲三分己一分之句。蓋歎其功名晼晩。而日月流邁也。戊申。鶴城君金完。爲本府判官。訪公于虎谷。坐於天使臺。柳上舍諸人皆會。酒未進。有大獐自長法山。下于稻田。鶴城曰。可惜趙兄老矣。若獲此獐。可代蘇仙之赤壁得魚。公。卽把羅將棍。下臺搜逐。不及五六十步。獐入掌握。生致臺上。鶴城大喜。賀其不衰。府伯成令公安義歎曰。吾以某只謂文章巨擘。豈料其有此逐獸之勇。昨日之獐。不啻文萬戶之虎也。己酉。中鄕解兩場。屈於禮部。丁巳。又貫三場。時李許當國。見其政亂倫喪。遂廢擧杜門。扁其堂曰。晝夢。惟以書籍自娛。癸亥。天佑大東。仁祖改玉。士林之深藏不市者。皆彈冠而出。公亦應擧。登甲子進士。自是屛跡衡門。絶意世事。遂築別業於方丈山西龍湫洞裡。徜徉逍遙。自稱山西病翁。噫。公以英拔嵬偉之資。有忠孝慷慨之節。龍蛇之變。憂國憤賊。扼腕流涕。只以祖母日迫西山。不得許身於國。而猶能奮義殺賊。其所素蓄積。槩可想矣。李忠愍。以統制。立大功而中丸卒。公詩以悼之。逮至丙丁。則衰病已甚。望斷赴難。而徒切忠憤。聞三學士殉節瀋中。感慨作詩曰。殺身柴市文承相餓死燕京謝信州。其忠義之氣。老而不衰者又可見矣。在舞勺之年。仰觀日變。逆知時亂。隨其見聞有此集。成童年先見。尤可奇也。自壬午止于戊寅。乃以五十七年間事。爲巨編八帙之書。名曰。山西雜錄。其於朝廷之事變。民生之休戚。時運之盛衰。世道之汚隆。無不備載。而嚴於淑慝逆順之分。尤惓惓於忠臣節士之跡。能使善者有所勸。惡者有所懼。實是衰世之一龜鑑也。有關於世道者亦大矣。公以名家遺裔。流落南鄕。不幸早孤。而乃能自奮力學。文章足以鳴於世。智勇足以顯於時。而才命不謀。齎志以歿。良可惜也。嗚呼。公雖不遇於當時。惟玆一書可以有傳於後世。雖謂之不朽可也。記昔甲子歲。公之折蓮而到門也。吾先子判書公。時以掌令。見邀於慶席。今公所抱秀才愃甫。袖其書來示余。求所以發輝者。余今年八十有一。衰病杜門。無意於翰墨。而念及疇曩。不勝感懷。不敢以老拙孤其意。乃取公自敍。略加删定。間附所傳聞於前輩者以爲一通。而至其當日人謀之臧否。事勢之緩急。觀此集者。自可以知之。今不復覼縷焉。

崇禎紀元三十九年丙午菊秋。朔寧崔是翁。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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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난중잡록 자서(自序)

오랑캐의 난은 어느 시대에도 다 있었다. 주 선왕(周宣王) 때에는 험윤(玁狁 옛 종족으로 흉노의 옛 이름)이 심히 기승을 부렸고, 또 한 고조(漢高祖) 때에는 묵특[冒頓]이 횡행하였으니, 6월에 출병시킨 일이라든지 후한 뇌물을 보내준 계략 따위는 본래 부득이한 일들이었다. 이제 왜적의 변란이 아무런 대비도 없을 때에 일어나서 먼저 상주(相州)에 견줄 요충지의 군사가 궤멸했고 또 장강(長江 낙동강을 말함)과도 같은 험새(險塞)를 잃어버려, 임금은 파천(播遷)하기에 이르렀고 종묘 사직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며, 8도는 함락되고 만백성은 짓밟혀 우리 국가의 당당하게 빛나는 왕업이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 민심은 한실(漢室)에 기울 듯 조국을 생각했고, 하늘의 뜻은 주(周) 나라에 돌아가듯 명 나라에 쏠려 관군이 패전하였지만 의병이 일어났고, 우리 군대가 패퇴하였으나 명군(明軍)이 왔다. 그리하여 비로소 토벌을 벌인 끝에 왜적을 국경 밖으로 몰아 내어 국토를 다시 회복하였고 파천했던 임금도 환도했으니, 명(明)의 출병이야말로 그 은혜가 막중하다. 그러나 천심(天心) 이 돌아서지 않으매 화근이 제거되지 않았으니, 적은 3면을 점거하고서 강화를 요구하여 온 것이었다. 황제의 도량이 관대하여 전쟁을 그만두고, 왕을 봉해 주기를 의논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휴식을 바랐다. 그리하여 멀리 사신을 보냈으니 이것은 후한 뇌물을 보내 준 옛 계략과 같은 것으로, 그 은덕 또한 높다 하겠다. 그런데 저 짐승과 같은 왜적들이 은덕을 저버리고 하늘을 깔보며 해[日]를 욕하여 관군을 도륙하고 침략을 자행하자, 황제의 위엄은 다시 진동하였다. 그리하여 고래[鯨]떼 같은 왜적의 무리가 사라지고서야 변경의 전진(戰塵)이 깨끗이 맑아지고 사방이 편안하여졌으니,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이보다 더 클 데가 어디 있겠는가. 아! 국운이 막혀 재화와 난이 연달아 일어나 7년 동안이나 전쟁이 계속되었고, 황제의 군사가 세 차례나 출동하였다. 싸우고 수비하기에 편할 날이 없었고 이기고 패하고 할 적마다 기쁘고 비통하였던 일은 한 마디로 다 말할 수 없다. 나는 때를 잘못 타고나서 이러한 난리를 만나고도 임금을 위해 죽지 못했으니, 신하되고 백성된 도리에 죄책을 면할 길이 없어 한밤중에 주먹을 불끈 쥐고 한갓 혼자서 눈물을 닦을 따름이다. 아! 비록 나랏일에 힘을 바치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은 늘 왕실에 있어서, 승전의 소식을 들으면 춤을 추면서 그 일을 기록했고 아군이 패전한 것을 보면 분함에 떨면서 그 일을 쓰고는 했으며, 애통한 말로 효유(曉諭)하는 교서(敎書)라든가 이첩(移牒)ㆍ공문ㆍ격서(檄書)에 이르기까지 본 일과 들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고 얻는 족족 기록하고, 간간이 나 개인의 의견을 넣어 연결시켜 글을 만들었다. 이 글이 후일 지사(志士)들의 격절탄상(擊節歎賞)하는 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충신 열사의 사적과 나라를 저버리고 임금을 잊은 자의 죄상이 여기에 누락되지 않았다면 직책 밖의 외람된 일이라는 책망을 나는 달게 받겠다. 아! 한 가닥 천성이 매우 강개하여, 옳지 않은 줄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책망을 당할 것인데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 임오년(선조 15년, 1582) 왜란이 싹튼 초기부터 비롯하여, 경술년(광해군 2년, 1610)에 겨우 안정되기 시작한 무렵까지 끝냈는데, 내가 정유년(선조 30년, 1597)에 피난하고 왜적을 토벌한 일을 그 다음에 다 엮어 넣어 나눠서 네 편으로 만들고 ‘난중잡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궁벽한 시골이라 견문이 고루하여 사실과 어긋난 기사도 없지 않을 것이나, 그 가운데는 또 선을 권면하고 악을 징계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려는 뜻도 많이 들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한때 잠을 안 자고 심심풀이로 읽는 데 그칠 뿐이랴. 공자가 이르기를, “나를 알아 주는 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고, 나를 벌하는 것도 오직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 하였는데, 나는 이 말의 뜻을 가지고 외람되나마 후세의 군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만력(萬曆) 무오년(광해군 10년, 1618년) 가을 7월 16일.

한양인(漢陽人) 조경남(趙慶男) 씀.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亂中雜錄自序]

外夷之患。何代無之。周宣之世。玁狁孔熾。漢高之世。冒頓橫行。六月之師。厚遺之計。固不得已也。今者海賊之變。出於恬嬉之時。先潰相州之師。又失長江之險。君父至於播越。宗社盡爲灰燼。八道淪陷。萬姓魚肉。我國家堂堂赫業。殆乎不忍言矣。何幸人心思漢。天意歸周。官軍敗而義旅起。我師退而天兵至。始行薄伐。驅賊出境。彊場重恢。蜀駕還都。六月之師。恩莫重焉。天心不悔。禍根未除。賊據三邊。控辭乞和。天度包容。罷戰議封。冀我寧息。遠遣行人。厚遺之計。德亦隆矣。羯狗孤恩。嫚天辱日。屠戮官兵。敢肆荐食。天威再震。鯨鯢崩退。邊塵掃淸。四境晏然。不幸。之幸孰大於是。嗚呼。國運迍蹇。禍亂連仍。七歲兵戈。六師三出。載戰載守。靡寧靡安。或勝或敗。可喜可痛者。誠不可以一言盡矣。我生不辰。逢此亂離。未死王事。爲臣爲民。咎責何歸。扼腕中霄。徒自抆淚而已。嗚呼。雖不能效力於國事。乃心罔不在王室。聞戰勝則蹈舞而記之。見軍敗則奮憤而書之。以至哀痛曉諭之敎。移檄傳通之文。所見之事。所聞之實。莫不隨得隨錄。間以余私意。連接成文。冀爲他日志士擊節之資。而忠臣烈士之事。負國忘君之狀。有或不漏於此。則出位之責。余何辭焉。噫。一端天性。慷慨弸充。知其非而未能止。受其辜而不自抑。起自壬午亂萌之始。終於庚戌甫定之初。余之丁酉避兵討賊之事。雜編於其次。折爲四篇。名之曰。亂中雜錄。僻村窮巷。孤陋寡聞。不無謬聽失實之記。其間亦多勸懲感動之意。此豈但一時罷眠而已也哉。吾夫子有言曰。知我者其惟春秋乎。罪我者其惟春秋乎。余以是竊有望於後來之君子。

萬曆戊午秋七月旣望。漢陽趙慶男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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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불천지위 국조문과방목 조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