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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풍군-가산공파 12세 모촌공(慕村公) 조광정(趙光庭)
[2019-04-01 18:55:09]





한풍군-가산공파 12세 모촌공(慕村公) 조광정(趙光庭)[3134]


 


강화평화전망대 : 망배단(望拜壇)/제적봉비(制赤峰碑)/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애사편강열의사추모비(愛史片康烈義士追慕碑)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산6-1 강화평화전망대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서 조정으로부터 초토사(招討使)로 임명된 이정암(李廷馣)1,000여 명의 일본군을 맞아 이곳에서 연안대첩(延安大捷)을 거두었습니다. 이를 기려 1608년 현재 북한지역인 황해도 연백군 모정리에 세웠는데, 실향민이 양사면 인화리(망향단)에 재건했고 이를 2009년 이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


임진년(1592)에 왜군이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했다.


우리의 방비(防備)는 미약했으나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한산도(閑山島) 앞바다에서 해전으로 왜군의 기세를 꺽었고 절도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은 진주성(晋州城)에서 분투(奮鬪)하여 충절을 다했으며,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은 의병(義兵)과 함께 연안성(延安城)을 지켜냈다. 또한 원수 권율(元帥 權慄)은 행주산선(幸州山城)에서 승리하였고 명()의 제독 이여송(李如松,1549~1598)은 평양성(平壤城)의 왜군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개성(開城)을 탈환 함으로써 3(평양. 개성. 한양)8도를 수복했다. 살펴보건대 고()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이정암(知中樞府使 李廷馣,1541~1600)은 지난 날 주상(主上)께서 몽진할 때 호종(扈從)했는데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던 공의 아우 정형(廷馨)이 형과 함께 개성(開城)을 지키겠다고 주청(奏請)하였고, 임진강 방어전에서 실패하자 공은 그해 822일 연안부(延安府)로 넘어갔다.


송덕윤(宋德潤). 조광정(趙光庭) 등이 의병 1백여명을 모아 반겨 맞으며 말하기를 공께서 부사(府使)로 있을 때 은혜를 베풀었던 이 곳을 지켜달라고 하여, 공이 싸워 죽을 곳을 얻었노라 하고 의병 5백여명을 모아 각자에게 임무를 분담시키고 가마솥을 걸어 노약자들도 구휼(救恤)했다. 28일 적장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재령(載寧). 신천(信川). 해주(海州)를 함락시킨데 이어 3천여의 병력을 몰고 연안성으로 쳐 들어오니 사람들이 놀라 성밖으로 도주하려했다.


공은 사수(死守)를 결심하고 겁을 먹은 사람은 출성(出城)해도 막지 않겠다하니 다들 감격하여 힘껏 싸울 것을 다짐했다. 저녁 무렵 연안성의 방어태세를 살피던 적의 신봉을 중문장 장응기(中門將 張應祺)가 화살로 사살하자 왜군은 성 서쪽에서 대포와 불화살을 쏘아 성내의 초가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했지만 때마침 풍향이 바뀌어 불길이 성밖으로 건너뛰자 적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적은 막사를 헐어 해자를 메우며 개미떼처럼 성벽을 기어오르자, 공은 섶 위에 앉아 아들 준()에게 성이 함락되면 섶에다 불을 질러 아비가 자진할 수 있게 하라 명하자 모두가 감읍(感泣)하며 죽을 각오로 나흘간 맞서 싸우니 적의 과반수가 죽거나 다쳤다. 적은 전사자의 시체를 모아 불사르고 다음날 아침 포위를 풀고 패퇴하였고, 아군은 적이 남긴 시체 18구를 구덩이에 묻고 우마 90여필과 군량미 130여석을 노획했다. 이 대첩으로 연안(延安)이하 13()가 회복되었으며, 아산(牙山). 강화(江華). 용강(龍岡)으로 이어지는 서해의 물길이 열린 것은 공의 힘이었다. 공의 본관(本貫

 

 

 
유래 불천지위 국조문과방목 조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