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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서원말 용연서원
[2009-02-12 10:55:30]




 





 







 

龍洲神道碑(趙絅)


公諱絅。字日章。姓趙氏。本漢陽人。趙氏始大於高麗。有僉議中書事之壽。是爲始祖。中書二世 曰暉。曰良琪。皆爲雙城摠管。又三世禮儀判書暾,漢山伯仁璧,右議政涓。皆以功烈貴。議政相太宗。諡良敬。於公爲七世祖。曾祖折衝將軍贈吏曹參判壽崑。祖工曹佐郞贈吏曹判書玹。父司贍寺奉事贈議政府左贊成翼男。二世皆以行藝特聞。母贈貞敬夫人柳氏。籍文化。贈承政院左承旨愷之女也。萬曆十四年十月六日。公生於漢陽之崇敎坊。柳夫人賢。敎養有方。生五年。始就學。十年。學旣通。能自力讀書。亦無他嗜好遊戲。十三。柳夫人歿。其居喪 。一如成人。明年。贊成公聘宋夫人。夫人父宋公見之嘆曰。他日童子必貴。家當受厚報。弱冠文詞蔚然有聲。白沙李相國恒福,車太常天輅皆許以爲奇才。二十七。選司馬試。明年四月。贊成公歿。李爾瞻已貴。欲與之私相善久矣。知公居喪之節。以爲守禮之士。非禮不可。必加禮厚奉給。遂欲深結之也。及光海政亂。爾瞻用事日久。公絶之。歸嶺南之居昌。不復應擧以避世。癸亥。仁祖克大難。收召才學士。公以遺逸。連爲高敞縣監慶尙都事。皆不就。明年。以刑曹佐郞 爲木川縣監。問民。修學敎。邑稱治。一年。去歸。丙寅。上親試士。公擢爲壯元。連在兩司。丁卯。建奴東搶。連陷安州,平壤。前年。國家始行號牌法。寇至。平壤民去號牌。掛之城堞而皆散去。時公爲司書。與文學金堉上疏。言罷號牌。以收人心。於是罷號牌法。上出幸江都。令世子撫軍湖外。公從之。奴旣約成而去。公以持平上疏言功臣縱橫不受命。湖西節度使琳赭先王之陵。以厚賂輕宥。諫官尹煌以斥和忤上旨。吏曹阿縱。上輒擬奏聞。書狀仍罪狀姜弘立。疏 奏。遞持平。戊辰。以校理論崔鳴吉別廟之非。爲養乞縣。不報。選入書堂。辭不報。復爲持平。先是。有大獄事連仁城君珙。睦性善,柳碩上疏。言全恩事。大司憲金尙憲。論以護逆。以僚議不可引避。公啓上曰。昔在昏朝。陷人必以護逆。其時尙憲仰屋竊嘆者久矣。不意今者。身自蹈之也。請遞尙憲。玉堂請兩遞之。上特命某勿遞也。公再引避。乃遞。辛未。以獻納移吏曹佐郞。尋陞正郞。以章廟追尊事。上怒。爭論者玉堂官五人。下理治之。公上疏曰。殿下顯親之道。不 幾於喪亡之轍乎。臣嘗在玉堂。斥追崇之論。與諸臣無異。請均被其罪。不報。尋改副校理。與諸僚吳等上箚。論典禮之非。上特出爲知禮縣監。兩司爭論請留。上怒。恐懼不復敢言。玉堂猶論執不已。上任之明年。統制使潝因括丁。督責多無狀。公棄歸。因潝啓。卒就理坐罷。癸酉。復爲吏曹正郞。乙亥。爲執義。因洛水絶流。大風拔木。穆陵,裕陵有變上疏。言遊宴,選後宮及營作事曰。以殿下之明聖。獨不覺悟。行之不疑。豈天誘殿下之衷。終歸於亡國而後已歟。 遞執義。尋復爲執義。以監試不法。論罷榜事。上不聽。大司憲金尙憲寢其啓。公引避。玉堂上箚遞之。上又特出爲文川郡守。副提學鄭蘊上箚諫曰。殿下以某爲何人也。其人篤行孝友。淸苦自守。又其文學博覽。可以置左右備顧問者也。其可以一言過戇。而遽示好惡之私也。上從之。拜軍器寺正。以繡衣。出湖南。旣復命。上曰。某出入民間。細知守令政治。民生疾苦。諸御史不如。丙子。以司諫應旨。上封事。言王子田宅踰制。章陵殯殿事。賞格無法。仍及 左相洪瑞鳳。受賂賣爵。歷擧武人李大廈納馬事。請因災異黜墨相。飭過愆。以爲應天之實。上不納。瑞鳳子命一。與大廈上疏請問。上令政院召問之。公對曰。大廈納馬事。不得諱於其鄕。傳者非一人。臣雖駑劣。告引他人。以證其言。國朝二百年。諫官無此事。昔燈籠錦事。唐介之風聞。賢如博。猶且面斥上前。博拜謝而已。未聞使其子自明也。仁宗雖貶唐介。亦未聞詰問也。臣之所聞。比唐介爲尤切。而瑞鳳之貪汚。又不止受一馬而已。因歷擧瑞鳳父子貪縱無 忌狀。有大臣以爲。某已遞諫官。王府事嚴。可以召問也。遂下理。同義禁閔馨男上疏。言囚諫官。國朝二百年。未之有也。經筵官兪伯曾。亦爲上言之。上曰。囚之者。大臣也。伯曾曰。殿下何以從大臣之言也。國人莫不憤憤言此事也。金尙憲上疏。力攻伯曾。仍言某旣不直於瑞鳳。及其人在相位。自疑見斥。摭無實語。欲一刺洞貫云。公實無不直於瑞鳳事也。上不答。明日。敎曰。尙憲挾憾相。其言之憤怒寒心。吏曹判書尙憲遞職。伯曾亦遞。上已知公忠直無他。 而瑞鳳以元功。上寵待之殊甚。爲之寬假之。公亦不問而釋之。丁丑。南漢解圍。廟堂以斥和者十臣議罪。以公嘗妄言詆廟堂。亦在議中。都承旨李景奭啓上曰。此人善類。亦以此罪此人。人心不服。上曰。予亦以爲不可。勿罪也。成寅。以司諫入謝。上引見文政殿。言國家之恥辱。仍白上曰。人心或以爲。朝廷與中國已絶矣。通信中國。以示不忘之義。上曰。事祕人莫知也。己先之矣。爲養乞郡。爲興海。臺臣以爲。某勁直。在朝廷則繩愆糾邪。補益甚多。不宜在外。 上曰。其情切矣。可遣之時。臺諫論劾金尙憲詐死沽名。不從。上出城。客有問之者。公曰。當車駕出城。特立者。鄭蘊,金尙憲二人而已。可褒不可罪也。己卯。謝歸居昌。庚辰。又以司諫上疏。進時務十策。癸未。差日本通信副使。自釜山水陸行四千里。至其國都。旣傳命。大享使。呈變幻淫巧奇怪百戲。以私其喜心。公不爲一顧也。倭人心嚴憚之。不復敢逞其淫技。沿途留館。饋遺皆不受。有日本記行關白說。還至釜山。馬島主宗義成者。傾巧憸回多不信。公不色假。辭受有 義。義成心慙恚之。因書契。頗致言朝廷。却之。旣復命。賞遠使勞。陞通政。拜刑曹參議。辭不就。尋爲金堤郡守。大臣白上。令憚壓道內。移全州府尹。其判官奇震興者。素畏惡之。陰愬於方伯。責以衙屬太濫。公卽去歸牙山。上任才十八日。公有亡弟寡妻稚兒。太夫人不忍離。故公請於朝以從。以故云。乙酉五月。奔哭昭顯世子。拜大司諫。上疏言生民之困瘁。災異變怪。近習貨賂。視朝倦怠事。仍陳勸戒累千言。上深納之。以爲至論。有內獄。令宦官主治之。又上疏曰。 掖庭有獄。始於漢時。衰國之治。宜付有司。使政刑出一。以示大公無私之治。又言淸宮禁。絶貨賂。上從之。而遞拜大司成。以母病歸。尋特拜刑曹參判。移大司憲。上賜姜氏死。公上二封事。一辭進階事也。一姜氏不可賜死事也。疏奏遞大司憲。尼山有上變事。上令出兵。公卽入京。仍拜吏曹參判。又以母病歸。拜大提學。仍爲大司諫。上疏辭之。又言李應蓍,趙錫胤事曰。殿下聽諫漸怠。不惟怠而已。抑制之。摧折之。竄逐之。自蔽耳目之聰明。遞大司諫。丁亥。以都承 旨。移大司諫。未謝。特拜刑曹判書。上疏辭之。因陳時務。請寬赦言事者李敬輿,洪茂績,沈 ,李應蓍等。以開言路。尋改禮曹判書兼裁省事。以歲饑。嘗請蠲民役以寬之。上令兼掌之。蠲大小煩費以便民。遷吏曹判書連辭不許。恢公道。抑奔競。申明守令薦擧法。因冬月大雷。白上曰。昭顯三兒何大罪。置之海島之中也。請赦還。上不聽。一日。引見大臣。大臣多言馨長爲國盡忠狀。公曰馨長謂之彌縫國事則猶可。謂之盡忠則不可。上頷之曰。此言是也。馨長初以商 賈。厚事命壽。得操縱之勢。縱橫無忌憚。巨室多傾事之。命壽本西邑官屬下賤俘虜。徒以口舌。竊國陰事。私於九王者也。方今國之大事小事。命壽皆知之。馨長實輸款云。其年。北使來。館伴李行遠稱疾不出。大臣白上。以公代之。命壽見公。私問曰。昭顯三兒安在。九王欲取育之。公正色曰。下國事。上國何可預知而有此云云也。命壽累問。累不答。命壽慍色而止。不復言三兒事矣。命壽恒言恚怒公不已。公聞之以爲貽患於國。上疏請免文衡籌司之任。命壽三兒之 問。蓋已有竊知之者。戊子。遷左參贊。因引對。言鄭蘊恥不遂決死。屛居深山之中。自同頭陀。甘自苦以終其身。其忠可賞。又上疏言之。不報。移大司憲。時南方大水。上修省疏累千餘言。己丑五月。上有疾。公掌內醫院事。及大漸。入侍而上薨。大臣引古事。欲撰遺敎。公曰。無遺命而撰遺敎不可。旣成服。有內旨爲大喪。聚女巫作祈禳之事。謂之宮中古事。公曰。先王之法。假鬼神以疑衆者誅。上疏斥之。自點以罪免相。公卜相。仍爲吏曹判書。李維泰者上疏。詆斥二三 士類。詆公尤甚。公嘗在憲府。論元斗杓樹儻要權。維泰執此攻擊云。公一上疏。遞吏曹。上對群臣言。維泰以此人爲小人。非吉人。爲禮曹判書。其九月。莅葬禮贊禮虞卒哭辭。遞大提學。爲左參贊。以撰長陵誌石文。進正憲。庚寅。北使來。以査問事爲言。旣至。會三公,六卿,政院,兩司。旣列坐饋以駱漿。公獨不受也。使者有慍色。責問前年弔祭大行王。無哭何也。公曰。事在五禮儀。使者無辭。又曰。謝表不及皇父王致弔何也。撰表者爲誰。問承文院。兪棨而方無職在外。又 問撰表而先見表者爲誰。公徐言曰。大提學先見之。以此爲咎。我且任之。領議政李景奭以奏文事。亦坐責。命壽以使者意言。令本國議罪。而私使之安置白馬。上爲之厚賜之以資行。且令沿道厚送之。白馬在義州南山。極高恒霧少日。無霧則恒風。四月寒氣如冬。元斗杓使至燕。狀啓言攝王於兩臣事。專言懷貳心叛我云。及使還。又言彼不但己也。欲全之事危矣。上爲之泣下。議遣使卞明。又曰。卞明兩臣。無偏輕偏重。適有使者來。而卞明事已。其書。言修城集 兵。原與倭無涉。耑與朕爲難。而無決語。命壽言大君使來則事解矣。時大君還自燕。才月餘日矣。上必欲遣之。而大君亦請行。上問邊上苦寒。厚賜之。十一月。貞敬夫人卒。右相李時白白上。令有司賜賻物本道。成葬埋之禮。後月。大君使還。許兩臣放還。而永不敍用。上又厚賜之曰。聞北京先報。喜不可言。公旣還。上疏自言誤事貽國之辱。又言西土人心風俗。薦士二人鄭麟壽,韓翼文。皆以才行聞者也。上令以軍職在都下。而公乞歸田里。以修史事召之。公 辭以淸人責言未已。應旨上疏言時事。仍及魯陵六臣旌表事。鄭蘊賜諡事。癸巳。乞養爲淮陽。明年春。遊楓嶽。仍謝歸。冬。圻內腥霧四塞。上疏曰。自金弘郁下獄死。君道日元。國事日非。災異日見。人心日離。忠言讜論。絶影於殿下之庭。上曰。忠君憂國。老而彌篤。乙未。公已七十。以耆老。上令本道賜米肉。至明年春。又賜之。及秋。又賜月俸。公辭不受疏十上。上終不許。領敦寧金堉上箚言災異。上怒。恐懼不知所出。公上疏諫。仍進養心之戒。上曰。處畎畝。不 忘諫忠臣義也。丁酉。上疏言尹根壽,鄭經世論諡事。請寬赦沈大孚,兪棨之罪。戊戌秋。耆老所有五老會。領議政金堉七十九。判中樞尹坰九十二。海恩君尹履之八十。公七十三。判書吳竣七十二。公又上疏辭月俸。仍進淸心寡欲之戒。己亥五月。上登遐。公入臨。旣成服而歸。命製諡冊文。進崇政。冬。乞致仕。下吏曹判書宋浚吉沮之。庚子。大饑。上疏言賑饑事。進屠隆荒政考。請免月俸。不許。辛丑。拜判中樞。辭不許。以製太王太后玉冊文。召之。時大旱。上避正殿。理 冤獄。下敎求言。公上疏辭之。仍言尹善道事曰。善道之罪。何罪也。善道以宗統,嫡統。爲孝廟左袒也。當善道獻疏之日。誰爲殿下進焚疏之策也。高麗恭愍王焚李存吾之疏。光海焚鄭蘊之疏。恭愍,光海非亡國之主乎。今日廷臣。其自許不沒沒。而不以堯舜之道導殿下。反以亡國之轍引殿下。何也。臣恐後之視今。猶今之視昔也。承旨南龍翼先啓。以張陰慘。激上意。令上不納。而三司爭起而攻之。請削官黜之。上命罷職而已。領相鄭太和曰。某處畎 畝。斥黜無損於其身。有損於國也。左相沈之源曰。某以三朝老臣。上下敎求言。而以言事得罪。此亡國之事也。尹飛卿,郭之欽等。媚事用事者。爭以攻擊爲功。三司論以遠竄者自四月至六月。上終不聽。甲辰。始有敍用之命。乙巳。公八十。執義吳始壽白上。有加資月俸之命。進崇祿。於是三司攻擊復起。公上疏力辭月俸。三上疏。上乃許之。戊申。有曾爲侍從者其父母年七十以上者。皆賜物或加資之命。男威鳳嘗爲諫院。以故加輔國。秋。入白雲山。欲仍遊紫 雲泉石。至文巖。入山三日。聞上有溫泉之幸。乃還。明年二月四日。公卒。春秋八十四。襲用深衣幅巾。殯於外寢之中堂。訃聞。上不視朝。巷市二日。其四月葬于先壟北十里鹿門東麓南向之原。貞敬夫人金氏。籍安東。國初左政丞士衡之九世孫。而吏曹判書瓚之女也。婉順謹飭。言不出閨門之外。事舅姑。庭無間言五十年。不喜誇務侈靡。公通顯於朝。貴踰九卿。女謁不行。苞苴不近。公稱之曰。內相之道。無媿於古人云。夫人生於萬曆十二年某月某日。卒於我孝 宗元年某月某日。春秋六十七。初葬於先壟之傍。至是。乃合葬。夫人三女一男。三壻。衛率李維楨,正郞李敦臨,生員李井徵。男正言威鳳。威鳳再娶而生四女三男。長女前妻出。而壻士人李允迪。次士人姜。餘幼。男九輅,九,九疇。李維楨七男二女。男著,滿, ,茂,蕡,葳,。壻趙始大,金棨。皆士人。李敦臨三男一女。男后定,后平,后昌。后定。生員。壻士人李師聖。李井徵二男一女。男溥,潞。壻生員沈柱。內外子孫。三世六十餘人。公簡靜。燕居若齋。一不以事物經心。不喜聲色玩 好。沈潛經術。於勢利。泊然無所動。不言不笑。端坐終日。不見惰容。雅言孝悌節行。詩書禮義。讀天下書。學博而見益高。其出言行事。非古人不爲。論文學以爲。秦,漢以來。太史公,昌黎,鳳洲最大家。其文章深奧勁切。卒澤於道德仁義。蒼然有古作者遺風。筆法尙右軍,魯公。亦勁古有法。蓋皆出於心。成於藝者然也。敎家重恩義。嚴內外。臨下威而恕。簡而不煩。使人人自安。平生敦厚樂善尙禮讓。篤於人倫。事父母安其寢處。樂其心志。必承意順適。色不怠。贊成公歿。 不形。哭無常聲。旣葬。不脫絰帶。飯疏食。守塚三年。贊成公疾病索。以過節不得進。終其身。不忍食。宋夫人年高。自公貴顯。榮養四十年而歿。公亦八十。衣衰麻卽位哭。居喪之禮。以敬爲上。祭祀非有疾病。不許代祭。代祭則必晨起盥漱。衣服冠而坐。以待卒事。齊戒必愼。將事必嚴。有稚弱弟。於贊成公爲遺腹子也。公撫育之。亦不以愛而敎弛。少有才學。不幸早殀。又其子威明幼孤。公敎之如視子。今登第爲某官。事君務大體。好犯直諫。每奏事旣退。未嘗與子 弟言其事。以直道不容於朝。通籍四十餘年。立朝僅七八年。其處患難窮厄。雍容閒暇。略無幾微見於色詞。嘗掌銓選。秉心公正。薦進賢良。門無私謁。出爲州郡。好淸靜。一以興敎化善風俗爲務。官位已盛。田園第宅。無一增益。妻子不免饑寒。孝宗特賜月俸。力辭不已。以無職食上爲恥。自灣上歸。屛居田里。名其廬曰寬居。樂山澤之遊。白鷺洲,三釜落,禾積淵,白雲洞。皆其遊賞處云。上禮遇益隆。思欲復用。而終不起。每聞災異闕失。必盡言不避忌諱。善乎其孤潔之 操。方剛之氣。出天之孝。貫日之忠。善始善終之學。難進易退之節。然出於泥滓之外。能使頑夫恥懦夫立。其在斯人歟。其在斯人歟。谷口有溪潭。曰臥龍潭。自號曰龍洲。寬居靜對錦柱山。亦曰柱峯老人。有遺文十卷。其銘曰。
敦厚禮讓。惟孝惟友。以篤親仁。奉君無私。秉心貞白。不緇不磷。博文古雅。本之道德。參以典墳。忠言直道。可表百代。名立德尊。不忮不求。好德康寧。彌年壽考。善始善終。積仁累義。天道之報。辛亥仲春之月傍死魄二日。孔巖許穆。撰


 


용주(龍洲)公 신도비(神道碑)


공은 휘가 경(), 자는 일장(日章), 성은 조씨(趙氏)로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조씨는 고려에 와서 비로소 번창해서,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 지수(趙之壽)가 있는데, 이분이 시조이며, 중서의 2세손인 조휘(趙暉)조양기(趙良琪)는 모두 쌍성총관(雙城摠管)을 지냈고, 3세손 예의 판서(禮儀判書) 조돈(趙暾)과 한산백(漢山伯) 조인벽(趙仁璧), 우의정 조연(趙涓)은 모두 큰 공적으로 귀하게 되었다. 의정(議政) 조연은 태종(太宗)을 도와 ‘양경(良敬)’이란 시호를 받았는데, 바로 공의 7대조이다. 증조는 절충장군 증 이조 참판 조수곤(趙壽崑)이요, 조부는 공조 좌랑 증 이조 판서 조현(趙玹)이요, 부친은 사섬시 봉사 증 의정부 좌찬성 조익남(趙翼男)인데, 2대가 모두 행검과 문예로 잘 알려져 있다. 모친은 증 정경부인 유씨(柳氏)로 본관은 문화(文化)이니 증 승정원 좌승지 유개(柳愷)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14(1586, 선조19) 10 6일에 한양의 숭교방(崇敎坊)에서 태어났다. 유 부인이 어질고 또 자식을 가르치고 기르는 데 방도가 있어서 난 지 5세 되는 해에 취학(就學)하였고, 10세에는 배움이 이미 이루어져서 능히 자력으로 독서하였으며 이외에는 달리 취미나 놀이가 없었다. 13세에 유 부인이 작고하였는데 거상(居喪)에 슬퍼함이 꼭 성인과 같았다. 이듬해에 찬성공이 송 부인(宋夫人)을 맞이하였는데, 부인의 부친 송공이 보고 감탄하기를,


“이 아이가 후일 반드시 귀히 되어 집안이 크게 보답을 받으리라.


하였다. 약관에 벌써 문장이 훌륭하다는 성가(聲價)가 있어, 백사(白沙 이 상국(李相國) 항복(恒福))과 태상(太常) 차천로(車天輅)가 모두 기재(奇才)로 허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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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 광해군4)에 사마시에 뽑혔고, 이듬해 4월에 찬성공이 작고했다. 이이첨(李爾瞻)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공과 사적으로 친숙히 지내려고 한 지 오래였는데, 공의 상중(喪中) 예절을 보고는 예를 지키는 선비라 예가 아니면 친숙할 수 없다 여겨, 후히 예로 대접하고 봉급(奉給)을 두터이 하여 깊이 친교를 맺으려 하였다. 광해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이이첨의 용사가 오래 가자, 공은 친교를 끊고 영남의 거창(居昌)에 돌아가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세상을 피하였다
.
계해년(1623, 인조1) 인조(仁祖)가 난을 평정하고 재학사(才學士)들을 불러 모을 때, 공이 유일(遺逸)로서 고창 현감(高敞縣監)과 경상 도사(慶尙都事)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형조 좌랑에서 목천 현감(木川縣監)으로 전직되어, 백성들의 고통을 묻고 학교를 정비하니 고을 사람들이 치적을 칭송하였으나 1년 만에 돌아왔다
.
병인년(1626, 인조4) 상이 선비를 친히 시험 보였는데, 공이 장원으로 선발되어 연이어 양사(兩司)에 재직하였다
.
정묘년(1627, 인조5) 건주 오랑캐가 동쪽을 침입하여 안주(安州)와 평양을 연이어 함락하였다. 전년에 국가에서 비로소
호패법(號牌法) 시행하였는데, 적이 평양에 이르자 백성들이 호패를 풀어 성가퀴에 걸어 놓고 모두 흩어졌다. 이때 공이 사서(司書)로 있었는데, 문학(文學) 김육(金堉)과 함께 상소하여 호패법을 혁파하여 인심을 수습할 것을 말하니, 이에 호패법이 혁파되었다.
상이 강도(江都)로 출행(出幸)하면서 세자를 시켜 호외(湖外)에 내려가 무군(撫軍)케 하니, 공이 수행하였다. 적이 얼마 후 강화를 맺고 돌아갔다. 공이 지평으로 상소하여, 공신이 종횡하여 명을 받지 않고 호서 절도사 유림(柳琳)이 선왕의 능침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는데도 후한 뇌물을 받고 가볍게 용서해 준 것과 간판 윤황(尹煌)이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상의 뜻을 거스르자 이조에서 상에게 아첨하여 주문사(奏聞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의망(擬望)한 것을 말하고, 이어서 강홍립(姜弘立)의 죄상을 논하니, 상소가 주달되자 지평에서 체직되었다
.
무진년(1628, 인조6) 교리로서 별묘(別廟)를 주장하는 최명길의 잘못을 논하였다. 봉양을 위하여 현()을 청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서당(書堂 독서당(讀書堂)을 가리킴) 선발에 들어갔으므로 사퇴하였으나 회답이 없었고, 다시 지평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큰 옥사가 있어서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 연루되었는데, 목성선(睦性善)과 유석(柳碩)이 상소하여 전은(全恩)을 말하니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역적을 두둔한다고 논하였으나 동료들의 의론으로 해서 되지 않자 사피(謝避)하니, 공이 계()를 올리기를,


“전날 혼조(昏朝) 재위시에 사람을 모함할 때는 반드시 ‘역적을 두둔한다’ 하니, 그때에 상헌이 앙옥절탄(仰屋竊歎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들보만 쳐다보며 탄식함)한 지가 오래였는데, 오늘날 자기가 스스로 그것을 답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상헌을 체직시키소서.


하였다. 옥당이 둘 다 체직시키기를 청하자 상이 특별히 모()는 체직치 말게 하니, 공이 다시 인피하자 이에 체직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9) 헌납에서 이조 좌랑으로 전직되었다가 얼마 후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장묘(章廟) 추존하는 로 해서 상이 쟁론하는 자에게 화내어
옥당관(玉堂官) 다섯 사람을 잡아들여 다스리게 하니, 공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사친(私親)을 높이는 방법이 나라를 망친 전철(前轍)에 가깝지 않습니까? 신이 옥당에 있을 때, 추숭(追崇)하자는 의론을 배척하기를 여러 신하들과 다름이 없이 하였으니 같이 그 죄를 받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회답이 없다가 얼마 후 부교리로 개임하니 동료인 오전() 등과 차자를 올려서 전례(典禮)의 옳지 못함을 논하였다.
상이 특별히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내보내니, 양사가 쟁론하여 유임시키기를 청하다가 상이 노하니 두려워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옥당은 그래도 논집(論執)하여 마지않았으나 상이 그대로 임명하였다. 이듬해에 통제사(統制使) 변흡(邊潝)이 장정을 검열하는데 독책하기를 무상하게 하므로 공은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흡의 상소로 인하여 끝내 하옥되고 이어서 파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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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년(1633, 인조11) 다시 이조 정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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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년(1635, 인조13) 집의가 되어, 낙수(洛水 낙동강)가 마르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목릉(穆陵) 유릉(裕陵) 이 있는 것을 인하여 상소하여 유연(遊宴)과 후궁을 선발한 것과 영조(營造)에 관한 일을 말하면서,


“전하의 명철하심으로도 홀로 깨닫지 못하고 이런 일을 행하며 의심치 않으시니, 어찌 하늘이 전하의 마음을 꾀어 나라를 망치고야 말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집의에서 체직시켰다. 얼마 후 다시 집의가 되어 감시(監試)에 불법(不法)이 있다 하여 파방(罷榜 과거에 급제된 사람의 합격을 취소함)할 것을 논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그 계를 중지시키자 공이 인피하니, 옥당이 차자를 올려 체직시켰다.
상이 또다시 문천 군수(文川郡守)로 내보내니, 정온(鄭蘊)이 차자를 올려 간하기를,


“전하는 모(某 조경을 가리킴)를 어떠한 사람으로 여기십니까? 그 사람은 효도와 우애를 독실히 행하고 몸가짐을 청고(淸苦)하게 하고, 또 문학과 박람(博覽)이 좌우에 두고 고문에 응하게 할 만한데, 그 한마디 말이 지나치게 고지식하다 해서 선뜻 호오(好惡)의 마음을 보이셔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여 군기시 정에 임명하였다. 암행어사로 호남 지방에 나갔다가 복명하자, 상이 말하기를,


“모()가 민간에 출입하여 수령의 정치와 민생의 질고(疾苦)를 자세히 알아서 다른 어사가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 사간으로 응지(應旨)하여 봉사(封事)를 올려서, 왕자의 전택(田宅)이 제도를 벗어난 것과 장릉(章陵)의 빈전(殯殿) 역사에 대한 상격(賞格)이 법도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이어서 좌상 홍서봉(洪瑞鳳)이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판 것까지 언급하고, 무인 이대하(李大廈)가 말[]을 바친 일을 열거하며, 재이(災異)를 인하여 묵상(墨相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운 정승)을 출척하고 허물을 신칙하여 하늘의 뜻에 따르는 실지로 삼기를 청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홍서봉의 아들 홍명일(洪命一)이대하

 

 

 
유래 불천지위 국조문과방목 조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