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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趙氏族譜序(삼권보시서문:1651년)
[2017-12-18 15:19:58]














潛谷先生遺稿卷之九/序잠곡유곡9권잠곡김육(金堉, 1580~1658)


 


漢陽趙氏族譜序


寧海趙使君贇。旣刊漢陽世譜于其府。貽書於余曰。子亦趙氏之外孫也。可無一言以弁其首乎。余答之曰。吾何敢。前有文節公之敍。後有太學士日章之文。尙奚用續貂爲哉。趙君又走人。請甚懇。余讓不獲。仍自念我淸風之金舊無譜。余慨然傷之。以爲人不可不知其所自出。又不可不知其所自分。一人之身。分而至於塗人。此理勢之固然。而漠然不知者。與飛走草木。奚擇哉。遂詢問同宗。廣求氏族志。積十餘年而始成。趙君之屢請於不佞者。必知其有尊祖敬宗之心。與自家同也。凡人之稟賦者。父生母育。同其恩而欲報之心一也。其於父黨母黨。親愛之心。亦何有內外之殊哉。趙氏之譜。卽文節公之所纂也。今已百餘年矣。其後子孫。則未知其支派之所分。余常以爲恨。欲有所述而未遑。今趙君與日章及諸公。同心協力。廣加聞見。錄而成譜。以續文節公之所纂。印出廣布。其志可嘉。而其誠亦至矣。趙君旣喜余之同志。而求一言於余。則何敢勿識其意。而孤其厚望哉。抑余於此。有所感焉。人之有譜者。欲其觀祖先之所爲而繼其迹也。觀其德行。則思所以盡學問之道。觀其文章。則思所以鳴國家之盛。觀其功業。則思所以報君父之恩。觀其淸白。則思所以遺子孫之安。自始祖以下。積德餘慶。流於後裔。功業文章。載於國乘。詩所謂夙興夜寐。無忝爾所生者。非此之謂耶。余所最悲者。外曾伯祖靜菴先生文正公學問文章。名於中廟朝。與我高祖大成公。志同道合。有麗澤之義。俱以王佐之才。爲一世所推仰。而不幸爲奸兇所構捏。陷於不測之禍。尙何忍言之哉。雖然。陰曀旣消。日月光明。 聖主首出。君子彙征。誅奸諛於旣死。發潛德之幽光。 贈以大官。賜以美諡。從食乎孔庭。俎豆於書院。士趨旣正。文風更振。天道之福善禍淫。昭昭乎不誣矣。嗚呼。孔孟之棲遑。程朱之困厄。亦理之不可知者。而道傳千載。名垂萬古。爲善者。何可以此而小沮也。子孫之觀斯譜者。其亦無怠而勖之哉


 


한양조씨족보(漢陽趙氏族譜)의 서문


 


영해 군수(寧海郡守) 조빈(趙贇)이 그 고을에서 한양 조씨의 세보(世譜)를 간행하고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자네 역시 조씨의 외손(外孫)이니 서문(序文)을 써서 한마디 하는 것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에 내가 답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서문을 쓰겠는가. 앞에는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의 시호임)의 서문이 있고 뒤에는 태학사(太學士) 일장(日章 조경(趙絅)의 자임)의 글이 있는데, 어찌 담비 꼬리를 잇는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조군이 또 심부름꾼을 보내어 아주 간절하게 청하므로, 내가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어 내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우리 청풍 김씨가 예전에 족보가 없었기에 내가 개연히 상심하여 “사람이 되어 자신의 출신을 몰라서는 안 되며, 또 그 분파(分派)를 몰라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몸에서 나와 나뉘어져서 길 가는 사람처럼 되는 것은 이치와 형세가 참으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까마득하게 서로 모른다면 금수(禽獸)나 초목(草木)과 더불어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이에 드디어 동종(同宗)들에게 두루 묻고 씨족지(氏族志)를 널리 구하여 10여 년간 공을 들여서 비로소 족보를 완성하였다. 그러므로 조군이 나에게 서문을 써 주기를 여러 차례 요청하는 것은 필시 조상을 떠받들고 종친을 존경하는 마음이 자신과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이 품부(稟賦)받은 것은 아버지가 낳아 주고 어머니가 길러 준 것으로, 그 은혜가 같으며, 그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도 똑같다. 그러니 부당(父黨)과 모당(母黨)에 대해 친애하는 마음 역시 어찌 내외(內外)의 다름이 있겠는가. 조씨의 족보는 바로 문절공(文節公)께서 찬한 것으로, 지금 이미 100여 년이나 되었다. 그 뒤의 자손들에 대해서는 나뉘어진 지파(支派)를 알 수가 없었으므로, 내가 항상 이를 한스럽게 여겨서 찬술(撰述)하려고 하였으나, 미처 겨를이 없었다.


 


지금 조군이 일장(日章) 및 제공(諸公)들과 더불어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합하여 여기저기서 널리 알아 낸 다음 이를 기록해서 족보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를 문절공이 찬한 것에 이어 붙여 간행해서 널리 유포시켰으니, 그 뜻이 가상하고 정성 역시 지극하다. 조군이 이미 내가 뜻이 같음을 기뻐하고 나에게 한마디 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러니 어찌 감히 그 뜻을 모른 체하면서 두터운 바람을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해서 느끼는 바가 있다. 사람에게 족보가 있는 것은 선조들께서 한 바를 보고 그 자취를 이으려는 것으로, 덕행(德行)을 보고는 학문의 도를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문장(文章)을 보고는 국가의 성대함을 빛낼 것을 생각하고, 공업(功業)을 보고는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청백(淸白)함을 보고는 자손들에게 편안함을 남겨 줄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시조(始祖) 이하의 적덕(積德)과 여경(餘慶)이 후손들에게 흘러 전하고, 공업(功業)과 문장(文章)이 국승(國乘)에 실려 있으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서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아주 슬프게 생각하는 일이 있다. 외증백조(外曾伯祖) 정암 선생(靜庵先生)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시호임)께서는 학문과 문장이 중묘조(中廟朝)에 이름났는데, 나의 고조이신 대성공(大成公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김식(金湜)을 가리킴)과 더불어 뜻이 같고 도가 같아서 이택(麗澤)의 의리가 있었다. 두 분 모두 왕자(王者)를 보좌할 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일세의 추앙을 받았는데, 불행하게도 간흉(奸凶)의 무고(誣告)를 받아 헤아릴 수조차 없는 화(禍)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니 어찌 차마 그 일에 대해 말할 수가 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음산한 기운이 이미 사라지고 해와 달이 밝게 비치매 성주(聖主)께서 나오고 군자들이다 등용되어, 이미 죽은 간사한 자들을 다시 주벌하고, 드러나지 않은 덕의 숨은 빛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높은 관작을 추증하고 아름다운 시호를 내려 성균관에서 배향(配享)하고 서원에서 향사(享祀)하였다. 이에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이미 바르게 되고 문학의 풍조를 다시 떨치게 되었다. 그러니 하늘의 도는 착한 자에게 복을 주고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린다는 것이 분명하여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아아, 공자와 맹자가 방황을 하고 정자와 주자가 곤욕을 당한 일은 역시 이치 가운데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는 천년토록 전해지고 그 이름은 만대토록 드리워졌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어찌 이를 이유로 조금이라고 기가 꺾여서야 되겠는가. 이 족보를 보는 자손들은 게을리하지 말고 더욱 힘 써야 할 것이다.






한양조씨족보중간서문〔重刊漢陽趙氏族譜序〕


1651년(효종2)에 한양 조씨의 족보를 중간하며 쓴 것이다. 족보가 처음 조원기(趙元紀)에 의해 작성된 후 영해 부사(寧海府使) 조빈(趙贇)이 김육(金堉)에게 서문을 청하고 다시 간행하였다. =용주공서문=

 

 

 
유래 불천지위 국조문과방목 조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