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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7대대종회장 국립도서관장 근영(趙根泳)


정파(靜派) 조근영(趙根泳)

국립도서관 설립, "국전(國展)"제 만든 문화계 큰 별 병참공파종회와 한양장학회의 기반 다져 서울의 강남구 신사동을 지날 때면, 큰길 한편에 멋지게 들어선 흰색 대리석 건물의 이름이 한양타운인 것에 많은 종인들은 문득 궁금증을 가질 것이다. 오늘날 이처럼 훌륭한 한양조씨병참공파종회 및 한양장학회를 이뤄내는데 크게 기여한 분들을 꼽는다면 그 중 한 분이 바로 정파(靜波) 조근영(趙根泳, 양경공파 26세) 선생일 것이다. 선생은 1896년 9월 6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 마을의 호은(壺隱) 종택에서 내은(乃隱) 조인석(趙寅錫) 선생과 어머니 진성(眞城) 이씨(李氏)와의 사이에서 기라성 같은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둘째가 헌영(憲泳, 제헌 국회의원. 한의학자), 셋째가 준영(俊泳, 경북도 지사), 막내가 여동생 애영(愛泳, 시조 시인)씨다. 선생은 경성제일고보(京城第一高普, 현 경기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수학하였으며 학업을 마친후 귀국하여 보성고보(普成高普)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일제(日帝)의 창씨개명(創氏改名)에 반대하여 교직을 떠나 고향 주실마을에서 뜻을 기르면서 후일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중에도 항상 종친을 잊지 않았던 선생은 부친 조인석 선생과 함께 「초경독본(初徑讀本)」을 저술하여 주실 마을의 교육에 앞장 서기도 하였다. 이 초경독본은 호은 종택내에 세워져 있던 영진의숙(英進義塾)에서 마을 청소년들에게 신문화를 가르치는 교재로 사용되었다. 부친 조인석 선생은 이외에도 20세기 전반 격동기의 여성교육을 위하여 「소녀필지(少女必知)」를 저술한 바 있으며 이 책은 정양완 선생의 역주로 현대어로 풀이되어 지금도 읽히고 있다. 또한 선생의 조부인 남주(南洲) 조승기(趙承基) 선생은 구한말(舊韓末) 의병대장(義兵隊長)으로서 일제와 맞서 싸웠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바 있다. 해방 이후 선생은 경북 치안유지회 회장, 서울특별시 경무국장, 적산관리처장(敵産管理處長) 등을 지내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반을 다지는데 일익(一翼)을 담당하였다. 특히 적산관리처장으로서 일제가 점유했던 재산을 우리나라로 귀속시키는 중대하고도 민감한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일체의 사사로운 욕심을 내지 아니하고 오직 부강하고 반듯한 국가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 하였다. 그 결과 오히려 직무를 마칠 때에는 적지않은 빚까지 졌었다고 하니 실로 청렴한 선비라 아니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선생은 문교부 문화국장 재임시 국립도서관을 설립하고 국전(國展, 현 대한민국미술대전)제도를 만들었으며 이후 국립도서관장을 역임하는 등 우리나라의 교육입국과 문화창달의 터를 닦았다. 그리고 국립도서관장 재임 중 부패한 자유당 정권에 맞서 동아일보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낸 뒤 사표를 냈다. 이 또한 선생의 강직한 성품을 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공직을 은퇴한 뒤에는 특히 종회의 발전에 힘을 써 1967년 11월부터 1971년 12월까지 4년 여동안 병참공파종회장을 지내면서 종친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기고 1982년 1월 18일 서울 자택에서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14년을 병환으로 있으면서도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고 고상한 품위를 유지하였고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안위(安危)는 나중에 두었으니 그야말로 진정한 선비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대외적으로는 주요 공직생활을 통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종중의 명예를 드높인 것 역시 기릴 만한 일이겠으나 무엇보다도 선생이야말로 병참공파종회와 한양장학회의 기반을 다진 분이었으니 후손들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일제시절 종중재산을 몰수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종중재산을 개인 명의로 옮겨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1918년 5월 일제령(日帝令) 제5호에 의한 임야조사 당시 압구정동 병참공 묘소와 부속 토지 및 임야 8필지 11정 8반 5묘를 병참공파 종중 대표로서 묘소에 가장 가까이 거주하는 종인 중 한 분의 명의로 등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4년 8월 종중과 아무런 협의 없이 그의 손자가 상속등기를 마쳤고 1965년 종중 대표들이 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1965년 12월 1차 판결에서 패소하였고 1966년 8월 2차와 1967년 3월의 3차 판결 역시 패소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상의 재산을 헛되이 잃을 수는 없으므로 종인들이 더욱 분발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1967년 11월에 종인들이 합심하여 종로구 수송동 사무실에서 병참공파종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1956년 종인들간에 최초로 계(契)를 조직했던 시절부터 계의 부회장을 맡았던 선생은 이 창립총회에서 종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다시 종회 재산 환수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회장 취임 직후인 1967년 12월 선생은 종회재산 환수를 위한 소유권 이전등기 소송을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여 재판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사재(私財)를 들여 상당한 경비를 부담하면서 재판에 매진하던 중 병환까지 얻었으나 거동이 불편한 가운데에도 자택 사랑방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대책을 논의하는 등 백방으로 진력을 다해 재판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약 4년 여의 송사끝에 드디어 1969년 3월 21일자로 대법원으로부터 승소판결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천신만고 끝에 어렵사리 찾은 압구정동 땅이 세월이 흐르면서 가치가 많이 상승하였고 후임 병참공파 종회장들의 훌륭한 운영으로 현재 신사동에 대지 1천 여평, 지상 7층, 지하 3층의 한양타운 빌딩을 소유한 실로 훌륭한 종회로 발전하였다. 또한 선생이 다진 기반 위에서 시작된 장학사업으로 지금까지 장학금을 받은 문중 학생이 무려 연인원 5천여 명에 총액 18여 억원에 이른다. 이처럼 종친과 종회를 위해 사비까지 들여가며 전력을 다해 기어코 종중의 재산을 되찾은 선생의 공로가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 이처럼 훌륭한 종회와 장학회가 가능했겠는가. 종회를 생각할 때나 장학금 이야기가 나올 때는 다시금 선생의 공적에 머리 숙이게 된다.

 

 

 
유래 불천지위 국조문과방목 조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