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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5대대종회장:각산(覺山) 영원(趙永元)

상해 임정원 의원, 한국독립군 총참모로 평생을 조국광복에 나라잃은 설음, 청년 독립운동가로 각산 조영원(1892.5.1-1974.4.1) 선생은 양경공-병참공-문간공의 11세손으로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들이 어려서부터 총명하기에 그의 부친은 농촌에 잡아두지 않고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친척집, 하숙집을 돌며 1907년(15세) 유신학교(維新學校)를 졸업하기까지 각산은 세상 물정을 경험하며 나라잃은 설음에 울분을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0년 조선이 일제에 합방되자 당시 서간도에 망명중이던 이동령(李東寧), 이시영(李始榮) 등 애국지사와 연결이 되어 국내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독립운동에 몸담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점차 활동범위가 상해 임시정부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에는 상해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 겸 교통부 참사직을 갖고 국내의 독립운동을 리드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만들어 보내는 등 활동을 하다가 1920년 8월에는 같이 뜻을 모아 독립운동을 하던 이상설(李相卨)이 일경에 체포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상해로 망명하여 곧바로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으로 피임된다. 망명 이듬해에는 임시정부 의정원의 비서장도 겸임한다.

온 가족이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한편 각산이 뛰쳐나온 향리인 창수면 추동리에는 각산의 부모와 처자가 비교적 부농(富農)으로 살고는 있었으나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생활에도 타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각산의 부친은 " 나라 잃은 처지에 농사는 지어 무엇하겠느냐 "고 급히 전답과 선산이 있는 임야 등 6만 4천여평을 당시의 돈 천몇백원에 팔고 온 식구가 북간도로 아들 각산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이주하게 되었다. 당시의 만주지방에는 방대한 농토가 개발을 기다리고 있었고 국내에선 자유와 삶에 쪼들린 동포들이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남부여대(男負女戴)로 온 가족이 이주하던 시절이었다. 무사히 만주 해림에서 각산과 가족이 재상봉하게 되고 터를 잡아 생활하게 된 것이 1927년, 각산의 나이 35세 때였다.

의열단 가입, 한국독립당 창당
각산은 안주한 가족과는 별도로 자신의 인생을 걷고 있었다. 1921년 5월에 임정내 비밀조직인 의열간(義烈團)의 집행위원이 되고 다음 해 2월에는 임정 의정원 국무원 비서장 서리로 활동하였다. 1924년 8월에 독립당 촉성회 대표 자격으로 만주에 파견되어 당조직을 확장하는데 힘썼다. 1926년 12월에는 김좌진 장군의 추천으로 신민부(新民府) 고문에 피임되고 2년후인 1928년 12월에는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는 만주일대를 누비며 독립운동단체와 당을 세우고 조직하고 이끄는 일에 몸바쳐 왔다.

해림 신창학교의 설립자 겸 교장
1929년 각산의 나이 37세시 각산은 해림(海林)에 2층 중국가옥을 매입 수리하여 신창학교(新彰學校)를 설립하고 스스로 교장이 되어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7-14세까지의 한민족 자녀를 무상으로 가르치고 교과서도 공급해 주었으며 교사 역시 무급으로 독립군 군인중에서 유능한 사람을 뽑아서 충원하였다. 한편으로 이범석(李範奭) 장군과 그 휘하의 30-40명의 숙식을 제공해 주었다고도 한다. 각산의 아들인 병의(炳儀)씨도 이 학교 1학년에 다녔다고 한다. 신창학교는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유명무실해 졌는데 이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으로 일제의 침략때문이었다.

신한농민당 창당, 항일활동 결집
각산은 신민부가 재정비 조직되고 군사부위원에 임명되자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며 1929년 5월에는 길림성(吉林省) 영안현(寧安縣) 한국동향회를 조직하고 간사장이 되어 당시 동삼성(東三省)내의 무입적 한인들이 축출당하게 됨에 동향회가 이들을 입적시켜 신분을 보장해 주므로 생활을 보존케 하였다. 1930년에는 재만(在滿) 독립운동자를 규합하여 신한농민당을 조직하고 조직부장으로 활약하였는데 당시 만주 사회의 어려움에도 알 수 있듯이 이합집산의 각종 단체가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었음을 알 수 있고 목적은 조선 독립에 모아 졌지만 각종 단체들이 자생(自生)하고 흩어지고 모이면서 자연히 세(勢)와 노선(路線), 방법의 차이로 갈등이 야기되고 반목이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신한농민당은 한족총연합회의 지도당으로 조직되어 계파간의 갈등과 이념의 차이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면서 항일 독립 투쟁활동을 결집시키고자 창당되었다. 이 당의 위원장에는 김광희(金光熙)가 선출되고 이달(李撻), 김일(金一), 이용한(李用翰), 김온순(金瘟順) 등이 중심이 되어 활약하였다.

한국독립군 총참모로 결사항쟁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각산은 이청천(李靑天)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독립군총사령부를 이종주(李鍾柱), 홍진(洪震) 등과 조직하고 총참모가 되어 남북만주에 산재한 독립군 청년동지를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 편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면서는 이듬 해 1월 중국항일구국군 총사령 이두(李杜)와 교섭하여 한중연합 항일 전선을 공동작전으로 전개키로 하였고 총참모로서의 각산은 독립군을 진두 지휘하여 여러 전투에서 다대한 전과를 올렸다. 각산이 2년간 독립군 총참모로서 일군과 결사 항쟁한 지역으로는 中東線一面坡, 橫道河子, 山市站, 石河海林, 拉古屯, 鐵嶺河, 八面通 등 전역에 이르며 8개현(縣) 한교(韓僑)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다.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면서 일경의 재만(在滿) 독립운동가의 색출 체포는 극에 달했다. 각산도 1933년(41세) 2월 그의 동지 안종명(安鍾鳴)과 함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돼 사형판결을 받고 신의주 감옥에 복역중 일제의 만주국 건립으로 소위 은사를 받아 5년간 집행유예로 6개뤌만에 석방되었다. 일본의 만주점령은 만주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가와 독립군의 맥과 근거지를 끊으며 와해되고 조직과 생존마져 위협받게 되었다. 각산은 그 후 해방이 되기까지 10 여년간 국내외에서 생불여사(生不如死)의 세월을 보내면서 비밀리에 맥을 이으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렇다 할 행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 기간에 각산은 가족의 생존을 위한 사업에 손대기 시작하였다. 아들 병의씨와 같이 중국어 언어소통이 가능한 점을 이용하여 중국을 상대로 한 소규모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무역업은 1950년 6.25사변 전까지 꾸준히 이어져 군자금 마련과 생계유지를 도왔고 또 작으나마 돈도 모으게 되었다.

해방후 대종회장으로 종사에도 발자취
각산은 해방(1945년)이 되자 즉시 중경에 본부를 두고 있는 광복군과 연락하며 국내 지대를 조직하여 선전부장이 되고, 한국독립당의 국내 조직을 재건하여 상임위원으로 피선되고 이듬해 3월에는 오세창(吳世昌), 김창숙(金昌淑)과 더불어 광복군 입국준비 환영회를 조직하여 광복군의 명예로운 입국을 돕기도 하였다. 각산은 해방후 한 때 순간(旬刊) "한보사"의 사장이 되기도 하였으나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6.25동란 후에는 사회가 안정을 되찾게 되자 일제말~ 6.25동란 전후 기간동안 침체된 대종회를 재조직하여 1956년 봄 한양조씨대종회를 재조직, 유석(維石) 병옥(炳玉) 박사를 도유사(都有司)로 하는 대보소(大譜所)를 설치하여 1959년 기해보(己亥譜)를 발간하였으며, 유석공 뒤를 이여 대종회를 이끌어 오셨다. 각산은 1964년 4월에 한독당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어 정치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그가 만든 당의 재건에 뜻을 두었을 뿐 실제적 정치활동은 미약했다. 1965년 3월 그의 독립유공에 대한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고 그 후 10년 가까이 정치활동의 일선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1974년 83세의 노환으로 별세하자 정부의 도움으로 광복회 장례를 치루고 그가 출생했던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1984년 포천군민의 이름으로 독립유공자 공적비가 창수초등학교에 세워졌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각산 조영원 선생은 전 생애를 명리(名利)를 초월하여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다가 고고(孤高)한 생애를 마쳤으니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의 고난의 역사와 함께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것이다.

 

 

 
유래 불천지위 국조문과방목 조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