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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유석 병옥박사

24세 유석 병옥박사 

 

 


충정공파.독립운동가 휘 인원의 아드님.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1894.3.21-1959.2.15)박사는 고려조에서 조순대부朝順大夫로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낸 중서공中書公(휘 지수之壽)을 시조로, 조선조의 개국공신신 충정공忠靖公(휘 인옥仁沃)을 파조派祖로 하여 청주 연정 땅에 처음 정착하여 그 곳을 세거지世居地로 만든 모계공慕溪公(12세조 휘 강綱)의 8세손인 인원仁元(호적명은 택원宅元)씨가 그 선친이다. 인원씨는 재형載衡 할아버지와 선산善山 곽씨郭氏 할머니 사이에서 1864년 5월 2일 청원군 연정리에서 출생하였으나 너무 빈한하여 부득이 천안 목천 용두리로 이사하였다.  3부자 독립운동, 광복후 건국훈장 그는 유년시절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개화에 일찍 눈을 떠 1919년 3월 1일 항일독립운동에 유관순柳寬順 학생, 차남인 병호炳鎬와 당질인 만형萬衡을 거느리고 천안시 병천면소재지 아우내장터 만세사건을 주도한 주인공이다. 이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3년간의 옥고 끝에 석방되었으나 출소후 몇 년만에 별세하였고 광복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인원씨는 아들 형제를 두었으니 장자가 바로 유석공維石公이고 차자는 위와같이 3.1독립운동으로 선친과 함께 옥고를 치르고 역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병호씨다. 공은 아버지 인원씨와 어머니 남양南陽 홍원섭洪源燮씨 사이에서 1894년 음 2월 15일 천안 용두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은 재주로 13살에 한문서당에서 서경書經에 통달하고 공주 영명永明소학교, 평양 숭실崇實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연희延禧전문에 재학중 미국으로 건너가 와이오밍 고교를 이수후 콜럼비아대 경제학과를 수료하고 그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귀국하여 연희전문 교수가 되었고 1927년 광주학생의거에 연루되어 3년간 투옥되었다가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사건으로 또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미군정청 경무부장, 정부특사 6.25때 내무장관으로 대구 사수 1945년에는 미군정청 경무부장에 취임하여 광복후 혼란기의 치안을 수습하였다. 1948년에는 정부특사로 미국을 비롯한 유럽과 아시아의 우방국을 순방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던 제3차 UN(국제연합)총회에 우리나라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하여 신생 대한민국이 국제적 신임을 받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49년에는 군사원조 특사겸 UN대표단 전권대사로 미국에 갔으며 1950년 6.25동란 당시에는 내무부장관에 등용되어 서울, 대전을 거쳐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남하하는 북괴군과 대구에서 대치했을 때 당시 UN군사령관인 워커장군이 대구마져 포기한다는 것을 극력 반대하고 설득하여 대구를 사수死守함으로써 그 해 9월 15일 UN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고 9월 28일 서울을 다시 탈환하게 하였다. 내무장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청렴한 민주인사들을 규합해 이승만李承晩 독재정권과 일장一場의 정론政論을 전개하여 대의군자大義君子의 족적族跡을 남겼다. 1959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 전 서거 불운, 국민장 1954년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정당의 지도자로서 민주정치를 위해 동부서주하는 가운데 1959년 11월 민주당 정부통령후보자지명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공의 건강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어 대사를 앞두고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으로 향했을 때는 1960년 1월 29일이었다. 하늘이 우리나라의 복을 빼앗아가 치료를 위해 미국까지 간 보람도 없이 2월 15일 서거 하여 유해로 김포공항에 돌아올 때는 조문하는 인파가 산과 들에 가득했고 사람들의 얼굴마다 서리는 근심이요 흐르는 눈물이었다. 1960년 2월 25일 국민장의 운구행렬이 성동 언덕머리에 머물적에 조포弔砲와 만사輓詞는 조객의 슬픈 감회를 더한 가운데 공은 수유리 북한산 건좌乾坐의 언덕에 영면하였다. 미국으로 떠나던 날 조박사의 무사귀환을 빌기 위해 김포공항에 운집한 수만 군중에게 공이 손 흔들며 한 말은 다음과 같다. " 사람들은 부귀를 말하지만 저 뜬 구름과 흐르는 물을 바라보라. 부귀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들의 당면한 사명은 민주사업을 건설하는 것 뿐이다... 낫는대로 지체없이 달려오리다." 이렇게 전송객들에게 외치며 떠났을 때 침울한 모습으로 묵묵히 하늘의 가호加護를 빌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 누가 알았으랴 ! 그 길이 살아서 가서 죽어서 돌아오게 되는 길이 될 줄을... 차남 6선, 삼남 5선 국회의원으로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 공은 부인 노盧여사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준형準衡은 일찍 타계하고 차남 윤형尹衡은 평생 야당의 지도자로서 민주주의 발전에 헌신한 6선選 국회의원으로 세상을 떴으며 삼남 순형舜衡은 6선選 국회의원으로 탁월한 의정활동을 하고 있으며 노대통령의 탄핵에 나섰다가 대구로 출마, 낙선하여 오다가 재보궐선거에서 당당히 성북구에서 당선 현재, 자유선진당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유래 불천지위 국조문과방목 조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