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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양절공 온

6세 양절공 휘 온 


양렬공의 장자로 6세 대종손이시다.
고려때 이조판서를 역임하셨다.
조선개국에 협찬하시어 개국공신 2등에 평양윤(평양시장)에 오르고,평안도 수주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시고,군인을 훈련시키고,호적을 정리하여 나라의 터전을 충실히 하는데 힘을 쏟으셨다.
1차 왕자의 난때 정사공신 2등에 책록,2차왕자의 난때 좌명공신 4등에 책록 되셨고,벼슬은 병조판서 등을 역임 하시고 벼슬이 보국숭록대부(정1품)의정부 좌찬성 겸 판 내자시사에 이르렀고,한천부원군에 봉하였다.청렴검소하기로 유명하다.
돌아가신후 조정에서 시호 양절공,부조묘를 명받았다.
묘는 파주시 교하읍 오도리 장명산 남록이었는데 2008년 충남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매산 제각곡 시조이하 5세조의 단소 아래로 이장하였다. 묘 계하에 둘째 아드님 한풍군 휘 완의 묘소가 계장되어 있다.
참고:묘소 시제 음력 10월 2일
부조묘 제향:음력 5월 19일.충남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노은동 세령재(장손 지추공 제각)
*부조묘 사우가 없어서 지추공 제각인 매산제각에서 양절공 부조묘 제향을 모시는 바 재력있는 종인은 종중에 1억원을 희사하시면 부조묘 사우를 건립할 예정입니다.1억원을 희사하신 종인에게는 종회에서 공로비를 세워 역사에 영원히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六世 良節公諱溫 墓碑陰記 

漢陽趙氏顯於麗季 國初連世有大名公佐我

太祖策開國定社佐命三大勳 勳業當炳國史而 史秘不可攷家藏遺像及世蹟遺勳

幷失壬辰之亂 以故歷官行治無能矢

先君子嘗曰 “洪陽族人世珍家有行狀一度寶襲而不許人窺逮 今訪其後嗣己失之

矣可勝歎惜“

公之衣履之藏在 於交河縣而墓碑且破傷以若 朝家賜牌禮葬之地其所痛歎尤當如

何哉 遠孫有鐸宅俊相繼往省來言厥狀曰 斷碑陰刻有邦楨參議四字

今右揆沈公之源昔牧洪陽日爲余言 嘗祇謁公墓是時石碣存其欸識乃 我外先祖判

決事公邦楨與參議公邦彦所樹也 然則判決參議於公爲玄孫 豈有至玄孫始碑之理

碑不得保完盖己再焉神道又闕豊鐫何歟

公性簡儉家無石砌 傳誦至今或因遺命勿立歟 有鐸倡爲重建之謨而儉議屬余以其

事逐 布告湖右宗僅能各出一端綿布合成三十有三匹 克善力綿計拙不克成功逾

十年所而綿布演爲五十其數迺者克善姑子朴承休來莅洪邑以其資屬焉不

數月工告訖前面大宇縣監鄭彦설所書仍叙顯末以示來裔云爾 後孫 掌令 克善


漢陽趙氏가 高麗末期에 顯達하여 國初에 이르러 대대로 큰 名望이 있었다.

公이 태조를 도와 開國 定社 佐命 세 가지의 큰 勳을 冊封 받았으니, 勳業이 마땅히 國史에 빛났을 것인데, 史記는 秘藏되어 참고 할 수 없고, 집에 寶藏된 遺像과 世蹟(대대로 전하는 遺蹟) 遺勳이 모두 壬辰倭亂에 실전되어 벼슬의 이력과 行治의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다.

先君子(자기 아버지를 일컬음)께서 말씀하시기를 “洪陽族人 世珍의 집에 行狀(평생의 행적을 적은 글) 한통이 있는데, 寶襲하여 남에게 보이기를 허락지 않는다.” 했었다. 이제 와서 그의 후손을 찾아가니 이미 유실된 것이다. 어찌 한탄스럽고 애석함을 감내하겠는가.

公의 묘소(衣履之藏)가 交河縣에 있는데 墓碑가 또한 破損되었다. 朝家에서 賜牌하고 禮葬(오늘날의 國葬)한 위치로서 통탄스러운 일 더욱 어떻다 말하겠는가? 먼 자손인 有鐸과 宅俊이가 잇달아 나가 살펴보고 와서 그곳의 상황을 말하기를 “깨진 비석의 후면 각자에 邦楨, 參議, 네 글자가 있다.” 했는데, 현재 우의정인 沈公之源이 옛날 洪州牧使로 있을 때 나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공의 묘를 봉심(祇謁)하였는데, 이때에도 묘갈에 기록(欸識)이 보존되었으니, 곧 우리 외선조인 판결사공 邦楨과 참의공 邦彦이 세운 바이다.” 했다. 그렇다면 판결과 참의는 公에게 玄孫이 되니, 어찌 현손에 이르러 비로소 비석을 세울 이치가 있겠는가? 비석을 보전 못하기가 이미 두 차례나 되었고 神道碑 역시 훌륭한 새김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公의 성품이 간략하고 검소하여 집에 섬돌(石砌 ; 오르내리는 층계 돌)이 없었다. 지금까지 전송(傳誦)된 것으로 보아 遺命으로 세우지 못하게 된 것인가?

有鐸이가 다시 세울 계획을 주창하자, 여러 의논으로 나에게 그 일을 위촉했다.

드디어 호우(湖右) 제종(諸宗)에게 布告하여 근근히 각각 한필의 綿布(무명)를 내게 하여 도합 33필을 거두었다. 克善이가 힘이 모자라고 계획이 졸하여 성공을 이룩하지 못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면포는 50필로 불어났다. 얼마 전에 克善의 내종(姑子) 박승휴가 홍주읍에 임관되자 그 자재를 위촉하여 수개월도 안되어 준공했는데, 前面大字는 현감 鄭彦悅이 쓴 바이다.

인하여 그에 대한 顚末을 서술하여 후손(來裔)에게 보이노라. 
 
後孫 掌令 克善

(한풍인, 온양군수 文穆公 克善1595년(선조28)-1658(효종9) ; 신묘3권보 편수, 양절공墓碑陰記 씀)

 

 

조온 [ 趙溫 ]의 묘표(墓表)
저자 조복양(趙復陽)
시호 : 양절(良節)

공의 휘(諱)는 온(溫)이요 성(姓)은 조씨(趙氏)로 그 선계(先系)는 한양(漢陽) 사람이다. 쌍성 총관(雙城摠管)을 지낸 조휘(趙暉)가 그 고조(高祖)이고, 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을 지낸 조양기(趙良琪)가 그 증조(曾祖)이다. 삼중 대광(三重大匡) 용성군(龍城君) 조돈(趙暾)이 그 조고(祖考)이고, 순성 익위 협찬 보리 공신(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용원 부원군(龍源府院君) 판소부시사(判少府寺事) 양렬공(襄烈公) 조인벽(趙仁璧)이 그 선고(先考)이다. 양렬공의 계실(繼室)은 환조 대왕(桓祖大王)의 딸이니, 양렬공은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매서(妹壻, 매제(妹弟)를 말함)인데, 고려 말에 국사(國事)가 다른 성씨(姓氏, 조선 태조를 가리킴)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서 곧 양양(襄陽)에서 노년을 보냄으로써 신하의 절개를 지키다가 목숨을 마쳤으므로, 양양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그를 제사하였다.

공은 양렬공의 맏아들인데,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섬기어 개국 공신(開國功臣)ㆍ정사 공신(定社功臣)ㆍ좌명 공신(佐命功臣)의 세 공신에 녹훈(錄勳)되고 한천 부원군(漢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양절공(良節公)이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의 왜란 때에 공의 유상(遺像)과 대대로 간직해온 문적(文籍)을 모조리 잃어버렸기 때문에 공의 언행(言行)ㆍ사적(事蹟)과 관력(官歷)ㆍ생졸(生卒)을 모두 고찰할 수가 없다.

이에 보첩(譜牒)과 전기(傳記)에 뒤섞여 나오는 것을 살펴보면, 공의 증손자인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가 쓴 족보(族譜)의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양절공과 양경공(良敬公)은 효성스럽고 염결(廉潔)하고 충성스럽고 성실함으로써 함께 훌륭한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특히 양절공은 협찬한 세 가지 큰 공훈에 있어 모두 의(義)로써 적절하게 처신하였으며, 공훈의 상사(賞賜)로 받은 것들을 살림이 가난한 친족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서너 칸의 작은 초가집에서 살았으므로 말[馬]조차 몸을 돌릴 수 없을 만큼 비좁았다. 또 밥상에는 별미의 음식이 없었고 좌석에는 두터운 요조차 없었으니, 연세가 여든이 되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변함없이 살았다.”고 하였다. 양경공은 곧 공의 아우인 우의정(右議政) 조연(趙涓)이다.

또 전하기를, “양절공이 별세한 뒤에 그 아들이 집을 새로 짓고서 양경공을 초청하여 낙성(落成)을 하였는데, 양경공이 그 집에 이르러 정제(庭除, 뜰의 층계)를 보더니 당(堂)에 앉지도 않고 나가버리며 말하기를, ‘백씨(伯氏)께서 살던 집에 계단을 설치하지 않은 것이 어찌 재력(財力)이 모자라서 그랬겠는가? 그런데 너희들이 선인(先人)의 검소한 덕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도리어 돌로 계단을 만들었으니, 나는 너희 집에 다시는 들어오지 않으련다.’고 하니, 여러 조카들이 두려워하여 즉시 허물어뜨렸다.”고 한다.

공의 손자인 사예(司藝) 조충손(趙衷孫)은 항상 여러 자제(子弟)들에게 타이르기를, “내가 석갈(釋褐, 과거에 급제함을 말함)한 날부터 선조(先祖, 조온을 말함)께서 행하신 바를 흠모하였으나 나는 선조처럼 해내지 못하였다. 우리 집안의 자제로서 만일 세상에 입신(立身)을 하고서도 혹시라도 양절공의 뜻을 저버리는 자가 있으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상국(相國) 홍언필(洪彦弼)이 지은 문절공(文節公)의 비문(碑文)에도 그 세계(世系)를 서술하면서 또한 ‘공의 청덕(淸德)과 준절(峻節)이 세상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노라’고 칭찬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공의 평생을 알 수가 있다.

대체로 호귀(豪貴)하고 분화(芬華)한 생활은 여러 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것이므로, 예로부터 훈귀(勳貴)의 가문(家門)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들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므로 옛말에 ‘빈천하게 살아가기는 쉬워도 부귀하게 살아가기는 어렵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공은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원훈(元勳)으로서 벼슬이 극품(極品)에 올라서 가문이 융성하고 총광(寵光)이 혁혁하였으되, 모든 것을 한결같이 청렴하고 검약함으로써 자신을 다스렸으며 마치 가난한 선비처럼 조촐하게 살았으니, 탁절(卓絶)한 조수(操守)가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해낼 수가 있었겠는가? 공의 4세손(世孫)인 정암 선생(靜菴先生)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러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하여 우리나라의 유종(儒宗)이 되고 부자(夫子, 공자(孔子)를 말함)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니, 그 또한 공이 덕(德)을 쌓은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리라.

공의 선비(先妣)와 부인(夫人)은 모두 어떤 성씨(姓氏)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부인은 모씨(某氏)라고 말하기도 한다. 5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조의(趙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고, 차남인 조완(趙琓)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고, 그 다음 조하(趙河)는 별장(別將)이고, 그 다음 조흥(趙興)은 선공감 정(繕工監正)이고, 그 다음 조육(趙育)은 의영고 사(義盈庫使)이다. 부사(府使) 이중경(李仲慶)과 호군(護軍) 윤희전(尹希錢)과 직장(直長) 이소인(李紹仁)이 그 사위들이다. 공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대대로 이름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까지 높은 벼슬에 오른 자들이 끊이지 않으니, 덕을 두텁게 쌓으면 복록이 오래 이어진다는 옛말이 참으로 믿을 만하다.

공의 장지(葬地)는 교하현(交河縣)의 모좌 모향(某坐某向) 언덕에 있는데, 옛날에 비갈(碑碣)이 있었으나 쓰러져 부서졌다. 이에 공의 8세손(世孫)인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조극선(趙克善)이 그 일을 슬프게 여기고서 여러 종인(宗人)들과 도모하여 재력(財力)을 모아 비석을 다듬고 장차 비문을 새기어 다시 세우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으며, 그 아들인 조창한(趙昌漢)이 뒤를 이어 성사시켰다. 장령(掌令, 조극선을 말함)은 학행(學行)으로 벼슬에 나아가 장차 크게 쓰이려고 하였으나 불행히 병이 들어 죽었으며, 조창한은 선친의 뜻을 잘 이어받아 마침내 이 비석을 세움으로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이 양절공의 묘소임을 알게 하였으니, 이 또한 비문에 기록할 만한 일이다.

 

 

 

 


 

 

 

 
유래 불천지위 국조문과방목 조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