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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춘향제
[2009-04-09 15:53:17]



도봉서원(道峯書院) 춘향제(春享祭) 에서-(1/2)

(2009/04/06 현재)



도봉서원(道峯書院) 춘향제(春享祭) 전경 입니다. 도봉구 도봉 1동에 있는 도봉서원은 서울에 현존하는 유일한 서원으로 1573년(선조 6)에 창건되었으며, 조광조(趙光祖)선생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창건과 함께 사액을 받았으며, 1696년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 하였습니다.
1775년(영조 51)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다시 받았으며,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에 의해 복원되었습니다.



 










 



 



 



 



 



 



 



 



 



 



 



 



 



 



 




 



 



 



 



 



 



 



 



 



 



 



 



 



 



 



 


***道峰書院***


 


 도봉서원은 서울에 소재한 현존하는 유일한 서원이다.


 1573년(선조6)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선생의 학문적 사상과 덕행을


추모하고 도학(道學)을 강의하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창건해서


다음해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1696년(숙종22)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을 


병향(竝享:위패를 나란하게 모심)하고,


1755년(영조51) 영조대왕의 친필현판을 받아 어필사액서원(御筆賜額書院)이 되었다.


 이곳은 본래 양주군 도봉산 계곡에 있는 영국동(寧國洞)으로


영국사(寧國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주변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서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이 났으며


일찍이 시인 묵객의 발걸음이 잦았던 곳이었다
 정암 조광조선생도 한양에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이곳의 자연경관을 매우 사랑하여 자주 왕래하면서 심신을 가다듬었는데,


청년기에는 제자들과 함께 와서 학문을 토론했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 벼슬을 할 때에도 휴가때면 찾아와서 사색하며 쉬었다
 이곳은 선현의 배향과 교육의 장으로 기능을 다하였고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고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에 단이 설치되어 향사를 봉행해오다가


6·25전쟁으로 중단되었으며,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에 의해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사우(祠宇)·신문(神門)·동협문(東夾門)·서협문(西夾門) 등이 있으며,


 사우의 오른쪽에는 조광조의 위패, 왼쪽에는 송시열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매년 음력 3월 10일과 9월 1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趙光祖(1482-1519)



중종(中宗)때 도학자이며 진보적 정치가,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관직은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선 중종(中宗) 때 성리학자(性理學者)요, 대유학자(大儒學者)이다. 삼사(三司)를 두루 거쳐 훈구세력의 부정을 척결하는 혁신 정치이념으로 유교적 도덕국가, 요순시대의 이상국가 건설을 목표로 도학(道學)에 의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해 38세의 젊은 나이로 유배지인 능주(綾州)에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 되었으며, 문집으로는『정암집(靜庵集)』이 있다



  ☆ 宋時烈(1607-1689)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우암(尤庵) 또는 우재(尤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사계 김장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요, 정암 조광조의 학통과 율곡 이이의 학설을 이어받았다.
 선생은 장희빈 소생의 왕자를 세자로 책봉에 반대하여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숙종15년 6월 8알 오전에 남원에서 사약을 받고 83년의 생을 마치었지만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등 다수가 간행되었으며, 사후(死後)의 문집으로는 『우암집』,『송자대전』등이 출간되었다


 



     ■ ■道峰書院과 巖刻文들 ■ ■


 


     ▶ 道峰洞門


 


 도봉산입구 매표소를 지나 공원의 입구에 들어서서 큰길을 따라가면


왼쪽에 땅에서 비스듬하게 솟아오른 바위가 보이는데


그 바위 사면에는 “道峰洞門(도봉동문)”의 네 글자가 행서체로 새겨져 있다.
 현종 9년(1668) 10월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62세의 나이로 도봉서원에 와서


 정암 조광조 선생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그떼  많은 선비와 주민유지들이 모여와서 강의를 요청하므로 며칠을 머물며 학문을 강론하였고


재학생들의 요청으로 붓을 들어 글씨를 남기니 “道峰洞門” 과 “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이다.
 그 중 “도봉동문”의 네 글자를 도봉산의 입구에 새겼다는데 “도봉의 동구문이 열리는 곳” 즉 도봉산의 입구를 알리는 의미이다.


 


    ▶ 高山仰止


 


 도봉서원앞 개울바닥에 새겨진 바위 글씨다.


고산앙지라는 말은 시경에 나오는 것으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으로    숙종 36년 (1700년 경진)7월에 곡운 김수증(1624-1701)선생이


이 글씨를 이곳에 남겼는데 정암 조광조선생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겼다고 본다.
 谷雲 金壽增선생은 굳은 절개로 유명한 김상헌의 장손이요 金壽恒의
형으로 동생 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버리고 화학산에서
운둔생활로 여생을 마친 유학자시다.


 


   霽月光風更別傳 


 


  도봉서원 왼쪽에 있는 개울로 내려가 바위를 더듬어 보면 "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라는 글씨와 그 아래에 조그만 글씨로 "華陽老夫書"이라는 암각문을 볼 수가 있는데 이 글씨는 특이하게 옆으로 글자를 눕혀서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글귀는 주자의 시가운데 한구절씩 발췌하여 쓴 우암선생 친필로써 이곳의 유생들에게 "도봉서원의 학풍은 주자의 학규를 본받아 정의를 지키고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도덕을 밝히고 공로를 계산하지 않은 진리의 전당으로 길이 발전해야 된다"라는 것이다.
 "제월광풍갱별전-霽月光風更別傳"이란 귀절은'비가 개고 달이 올라 시원한 바람이 다시금 특별히 이어받았도다'라는 뜻이고 요장현송답잔원(聊將絃誦答潺湲)"는
 '애오라지 거문고를 치며 노래하여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화답하네'라는 뜻이다.


 


   ▶ 光風霽月



  도봉서원의 앞 계곡 개울가에 있는 '염락정파 수사진원' 바위글씨와 '


고산앙지'바위글씨 사이에 있는 커다란 바위의 비스듬한 사면에 세로로 '光風齊月'이라고 커다란 글씨가 새겨있고


그 왼쪽 아래에는 조그만 글씨로 泉翁書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비가 내린 후 맑게 개인 날씨에 시원하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 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아무 꺼리낌 없는 맑고 밝은 인품'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泉翁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재(李縡:1680∼1746;숙종 6~영조 22)를


지칭하는 의미로 이재는 도암(陶菴), 또는 한천(寒泉)이라고 했는데


경종 때 한성판윤을 지냈다고 합니다.
그는 김창협의 문하에서 조광조, 이이를 사숙한 성리학계의 대가이며 


말년에는 소론과의 정쟁에 밀려 용인의 한천(寒泉)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길러내는데 전념을 하였다.
스승인 김창협의 문하에서 정암 조광조선생을 사숙했다고 하니 ,


 이곳 정암선생을 모셔놓은 도봉서원의 앞 계곡에다가 '光風霽月'을


새겨놓은 것을 보면 정암 선생을 흠모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舞雩臺



 도봉서원 앞 개울가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옆으로 뉘여서 새겨진


"제월광풍갱별전(霽月光風更別傳)"이란 바위글씨(암각문)가 있는데


그 머리맡에는 초서로 힘있게 새겨놓은 '무우대(舞雩臺)’라는 글씨가 세로로 서있고


그 옆에 조그맣게 한수옹(寒水翁)이라고 글쓴이의 별호도 있습니다.
 논어의 선진 편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느 봄날 증점이라는 제자가 공자를 모시고 있을 때 공자께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말해보아라"라고 물으셨더니 증점이 대답하기를; 
"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이라고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즉 "늦봄에 봄옷이 이미 지어졌으면 어른 오륙인과 아이들 육칠명을


데리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는데,


 이 것을 들으신 공자께서 감탄하면서 '나도 너와 함께 하고 싶구나."라고 하셨다고 한


일화를 떠올리며 선생이 여기에 무우대(舞雩臺)를 새겨 놓았을 것이다.  
 기(沂)는 중국의 산동성에 있는 기수(沂水)라는 강의 이름이고


무우(舞雩)는 비를 내려달라고 하늘에 제사, 즉 기우제를 지내던 무우대(舞雩臺)를 지칭한다고 합니다.
 증점의 이와같은 생각은 지엽적인 정사에 얽매이지 않고 천리유행(天理流行:하늘의 이치에 따라 처신한다)의 이치를 체득한 경지를 말한다
 한수옹(寒水翁)은 조선 후기의 학자인 수암(遂菴) 또는 한수재(寒水齋)라는 호를 썼던 권상하(權尙夏: 1641~1721) 선생입니다.
 선생은 인조19년(1641)에 태어나 송시열의 수제자였고,


유학의 중창자이며 기호학파의 지도자였으니 스승을 모신 사원에 참배하고 그 심정을 담은 무우대라는 글씨를 남겼으리라



  염락정파 수사진원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제월광풍~" 글씨와 권상하 선생의 "무우대" 글씨가 새겨진 바위의 바로 위쪽에는


그보다는 작은 바위가 솟아 올라있습니다.
 송시열, 권상하 선생의 바위글씨는 개울로 내려서야 보이지만


이 바위글씨는 등산로 옆 화단으로 올라서면 바로 위의 그림에 있는 바위가 보이고


또한 그위에 세로방향으로 새겨진 두줄의 바위글씨 "염락정파 수사진원(濂洛正派 洙泗眞源)"을 볼 수 가 있습니다.
 행서로 깔끔하게 내려쓴 두줄의 글씨 옆에는 조금만 글씨로"춘옹서(春翁書)"라고 되어 있는데


"춘옹"은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또 다른 호라고 합니다.
 염락(濂洛)은 염계(濂溪)와 낙양(洛陽)으로, 송유학(宋儒學)을 일으킨 주돈이와 그 제자 정호, 정이 형제를 배출한 곳이며,


수사(洙사)는 공자의 구기(舊基)인 권리(闕里)가 있던 곳이랍니다.
따라서 염락과 수사는 송학(宋學)과 선진유학의 대명사이 지요.
이 "염락정파 수사진원"은  성리학의 바른 물결과 공자사상의 참 근원 이라는 말로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도학정치(道學政治)의 구현을 위하여 노력한 조광조를 흠모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동춘당 송준길(선조39년~현종13년, 1606~1672)선생은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성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고, 특히 예학에 밝아


일찍이 감장생이 예학의 종장이 될것을 예언하기도 하였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도봉서원(道峯書院)**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 1동에 있는 도봉서원은 서울에 현존하는 유일한 서원이다.



선조 6년(1573년),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租)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창건된 후, 숙종22년(1696년)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병향(竝享-위패를 나란히 모심)하였고, 영조 51년(1775년)에는 영조대왕의 친필 사액을 받은 어필사액서원(御筆賜額書院)이다.



고종8년(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되었다가 1971년 경향유지의 찬조로 사우(詞宇)를 다시 세워 정암 선생과 우암 선생 두 분 선생의 위폐를 모시고 춘·추로 향제를 지내고 있다.


국립공원 도봉산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위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이 났으며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곳이다. 도봉서원 앞의 기암괴석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바위에 새겨진 많은 암각문 등, 청아수려한 풍치는 이곳을 찾았을 옛 선인들의 풍류를 느끼게 한다.


              



요즈음 건강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도봉산을 오르는 길에 도봉서원을 찾아본다면, 잊혀져가는 우리의 민족문화 계승이라는 의미와 아울러 정암 · 우암 두 분 선생의 삶을 돌이키며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진지한 해답을 얻는 보람도 있을 것이다.



실버넷 뉴스 박신옥 기자  psinok@silvernew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