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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 동명서원
[2009-02-22 20:05:18]



 


 



 



 






 

동명서원(東冥書院) : 소재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548번지 성안마을


 


동명서원은 조선 인조6년(1625년) 당시 도호부사였던 현곡공(玄谷公) 조위한(趙緯韓,양절공- 한풍군- 가산공파 13世)이  정헌 노경복과 지방유림 대표 최정립, 이현일 등의 협력으로 양열공의 숭고한 교학이념과, 위대한 호국정신,  그리고 만고불변의 충절을 본받기 위하여, 조산리에 창건 하였다. 원래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양열공(襄烈公) 조인벽(趙仁璧)을 배향하였으나 후에 그의 넷째아들인 가천재공(嘉川齋公) 조사(趙師)를 함께 모시게 되었다.


 


서원을 세운지 60년 되던 해에 병자호란으로 건물이 타 버렸는데, 이후 100년이 지난 정조10년(1786)에 경상북도 봉화군에 사는 양경공 병참공파 후손들이 봉화군 봉성면 와란마을에 서원을  다시 세웠다. 이전, 복원하면서 양열공의 6세손인 단구공(丹邱公) 조정(趙貞)을 함께 배향하였었다. 그후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리게 되었으나 광무 2년(1898)에 재건을 목적으로 강원도관찰사 공판공(工判公) 조종필(趙鐘弼,한양조씨 초대 대종약장)이 서원을 복원하고자 창건지인 조산리에 동명서원유허비를 세워 훗날을 기렸다. 그후 1974년(대종회장 성원)에 서원 복구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1979년 양양지역 유림과 한양조씨종중에 의해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1982년 현재의 자리(양양군.읍 조산리 548번지, 성안마을)에 사당(충현사)과 강당이 건립되었다. 건물이 노후되어 1999년 11월에 한양조씨대종회 주관으로 전면적인 대보수공사를 마쳤고, 동년5월에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서원건물은 사당이 팔작 지붕에 10평, 강당도 팔작지붕에 13평, 3문은 3평으로 전체적으로 단순한 구조이며, 담장길이는 29m이다. 매년 음력3월 둘째 정일에 춘향제례가 봉행되고 있다.


 


조인벽선생은 고려 29대 충목왕 이하 5대에 걸쳐 평생을 국토방위와 국가 치안에 전력을 바친 문무 겸비한 노 재상으로 왜구 퇴치와 홍건적(중국 원나라 말기 하북지방 도둑의 무리) 격퇴 등으로 무공을 많이 세웠고 학문에도 뛰어났다.


 


고려 공민왕 5년(1356) 26세 때 아버지 조돈과 함께 쌍성회복에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를 도와 이성계 등과 협력하여 많은 공을 세워 호군이 되고 공민왕 11년(1363) 김용(金鏞)토벌에 공을 세워 수복경성(收復京城) 2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공민왕 20년(1372년) 판사겸 만호로써 가주의 난동자들이 지방관리를 죽이는 일이 있자 그들을 토벌하였으며 함주,북청에서 복병으로 왜구를 대파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랐다.


 


우왕 1년(1375)밀직부사로서 충혜왕의 아들을 자칭한 중 석기(釋器)를 잡는데 공을 세우고 다시 동북면 원수로 출정하여 왜구를 토벌했고 1377년 신주․옹진․문화지방에 침입한 왜구룰 공격하였으나 적세가 완강하여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판밀직(判密直))으로서 화포를 사용하여 수군을 훈련시켰고 1379년에는 강릉도원수(江陵都元帥), 다음해엔 강릉도상원수가 되어 왜구를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다.


 


1383년에 문화찬성사로서 동북면 도체찰사가 되고, 1385년에는 사도도지휘사(四道都指揮使)가, 그리고 곧이어 교주도원수(交州道元帥)가 되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에 참가한 뒤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쳐, 1389년(공양왕1)의덕부판사(懿德府判事)가 되었다. 이듬해 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책록되고, 이러한 공으로 1393년에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삼중대광 용원부원군 에 봉해졌다.


 


배정경부인은 하동정씨니 1남1녀를 두었고, 하동정씨 부인이 졸한후, 환조(桓祖:이성계의 아버지)의 딸 정화공주(貞和公主)와 재혼하여 6남2녀를 두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어 처남인 이성계가 여러번 조정에 들어올 것을 권하였으나, 불사이군의 굳은 절의로 불사하고 두문동에 드셨다가, 현직에 계실때 인연을 맺은 양양의 조산리로 내려 가시여 여생을 보내시면서 유생들을 교육하고 후생계도에 진력 하였다.


 


산소는 이북지역 개성의 장단에 모셨기 때문에 남북이 막혀서 자손들이 산소를 봉심할 수 없어서, 신도비를 이곳 선생의 위패를 모신 동명서원 앞에 잠시 세워서 한을 달래고, 남북통일이 되면 이 비를 선생의 산소앞에 옮겨 모시기로 하였다. 단소나마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동 매산제각골(2004년에 한양조씨 시조 중서공 이하 2~5세조 단소건립)에 마련하여 시제를 모시고 있다.


 


조사는 넷째 아들로서 형님들이 조선왕조에 공을 세우고 벼슬을 하고 있으므로 가천재공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 양양에 내려와 지극한 정성으로 부공을 모시였으며, 사후 지하에서나마 스승이신 포은 정몽주선생과 노닐수 있도록 포은선생 묘역 인근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능원리 까치눈골에 모셨다.


 


2005년4월 강원지역 산불로 인하여 사당인 충현사가 소실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