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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충정공(忠靖公) 조인옥(趙仁沃) 묘소
[2017-04-29 11:48:53]














경기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산 34-3


한양조씨 7세 병참공(兵叅公) 조련(趙憐) 묘소






有朝鮮純忠舊義佐命開國元勳


資憲大夫吏曹判書漢山府院君


贈謚忠靖漢陽趙公仁沃神道碑

번지명) 경기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 산 103-1 번지


조인옥[趙仁沃]의 신도비명(神道碑銘)


- 문성공(文成公)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


[조후(趙侯,한양조씨5세 안정공)사위]





공의 성()은 조씨(趙氏)이고 휘()는 인옥(仁沃)이며, ()는 군계(君啓)이고 본관(本貫)은 한양(漢陽) 사람이다. 고조(高祖)는 조지수(趙之壽)인데 육진(六鎭)에 들어가 비로소 용진(龍津) 사람이 되었고, 증조(曾祖)는 조휘(趙暉)로 쌍성 총관(雙城摠管)을 지냈다. 조고(祖考)는 조양기(趙良琪)로 부친의 관직을 세습하였는데, ()나라 세조(世祖)가 주사(舟師, 해군(海軍)을 말함)를 출동시켜 동쪽의 일본을 정벌하면서 고려에 명하여 군대를 지원하도록 하니, 총관(摠管, 조양기를 말함)의 나이가 그 당시 13세였는데 충렬왕(忠烈王)에게 아뢰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출정하였다가 군대를 온전하게 하여 돌아왔으며, 합단(哈丹)의 군대가 철령(鐵嶺)을 넘어 도망하다가 쌍성에 이르자 총관이 그들을 노획(虜獲)하여 스스로 원나라 세조에게 바쳤다. 당시 총관의 나이가 21세였는데, 원나라 황제가 이 사람은 장사(壯士)이다.”고 하고서 금포(錦袍)와 옥대(玉帶)를 하사하였다. 충렬왕이 또 그의 계책을 써서 등주(登州)의 잃어버린 땅을 41년 만에 비로소 수복(收復)하였다.


 


 


공의 부친은 조돈(趙暾)으로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는데, 공민왕(恭愍王) 때에 화주(和州) 등의 옛 강토(疆土)를 수복한 것은 그에게 힘입은 것이 많았다. 홍두군(紅頭軍, 홍건적(紅巾賊)을 말함)이 기병(起兵)하자 천하가 감히 그 예봉(銳鋒)을 감당하지 못하여 갑자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평양성(平壤城)을 함락시켰는데, 용성군이 원수(元帥)인 안우(安祐)를 따라 그들을 공격하여 패주(敗走)시켰다. 공민왕이 난리를 피하여 남쪽으로 가니, 용성군이 항상 궁궐에 숙위(宿衛)하는 군대를 관장하여 왕에게 신임과 중시를 받았다. 용성군은 평리(評理)에 추증된 이홍(李洪)의 딸에게 장가들어 원()나라 지정(至正) 정해년(丁亥年, 1437년 충목왕 3)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선대(先代)의 훌륭함을 타고나서 태어날 때부터 보통 아이와 달랐고 매사를 배우지 않고서도 능히 해냈으며, 또 조금 자라서는 서사(書史)를 좋아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361년 공민왕 10)에 처음으로 산원(散員)에 보임되었고, 이듬해에 낭장(郎將)으로 승진하였다. 대명(大明) 홍무(洪武) 병진년(丙辰年, 1376년 우왕 2)에 중랑장(中郞將)에 올랐고 두 번 호군(護軍)으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비순위(備巡衛)와 감문위(監門衛)의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한 뒤에 사복시(司僕寺)와 전의시(典醫寺)의 판사(判事)로 개임(改任)되었다. 비록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였으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므로 사대부와 선비들이 평소에 그 소문을 듣고 공에게 종유(從遊)하는 자들이 많았다.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공이 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과 더불어 태조에게 통감(通鑑)을 진강(進講)하였고, 무진년(戊辰年, 1388년 우왕 14)에 고려의 폐주(廢主)인 신우(辛禑)가 절위(竊位)하여 망녕스럽게 군대를 출동시켜 요동(遼東)을 공략하였는데, 그 당시 우리 태조가 우군 도통(右軍都統)이 되었다. 태조가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의로운 군대를 거병(擧兵)할 때 공이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전택(田宅)을 하사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389년 공양왕 원년)에 좌대언(左代言)이 되어 왕명을 출납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390년 공양왕 2)에는 전법 판서(典法判書)로 옮겼는데,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부녀자들이 절에 가는 것을 금지하도록 건의하여 마침내 영구한 제도가 되었다.








임신년(壬申年, 1392년 공양왕 4)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승진하였는데, 그해 가을 7월에 태조가 흥운(興運)하여 개국(開國)하자 공이 한두 대신과 더불어 대의(大義)를 수창(首唱)하여 똑같은 의견으로 태조를 추대하였다. 그 공로로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임명되고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으며, 가정 대부(嘉靖大夫)로서 순충 좌명 개국 공신(純忠佐命開國功臣)의 훈호(勳號)가 내려졌다. 태조께서 일찍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남은(南誾)과 조인옥(趙仁沃)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 대업(大業)을 성취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그해 10월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노숭(盧崇)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경사(京師)에 갔다. 이듬해 3월에 돌아오다가 평양(平壤)의 삼상(三湘)에 이르러 대동강(大同江)에 배를 띄우고 놀았는데, 삼봉 선생(三峰先生, 정도전을 말함)이 강지수사1)(江之水詞)를 읊어 그 뜻을 스스로 표현하자 공이 붓을 쥐고서 그 발사(跋辭)를 썼는바, 글이 매우 전아(典雅)하고 아름다웠으므로 삼봉 선생이 크게 칭탄(稱歎)을 해주었다.


 


 


공은 말씨가 어눌하고 풍채가 위려(偉麗)하였으며 태도가 엄격하고 장중(莊重)하여 사람들이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였다. 헛된 말을 하지 않고 기쁨이나 노여움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 조리(操履)의 고상하고 견고함이 남들보다 매우 뛰어났다. 또 조정에 벼슬할 때 응대(應對)하는 재능이 있어서 매양 조정에 사신이 올 때마다 공이 반드시 접반(接伴)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394년 태조 3) 3월에 병에 걸려 오랫동안 낫지 않아 3년이나 앓으니, 태조께서 의원을 보내 문안하게 하는 일이 잇달았으며, 특별히 신기(神祇, 귀신(鬼神)을 말함)에게 기도하도록 명하였고 또 장사(葬師, 지관(地官)를 말함)로 하여금 고비(考妣)의 묘소를 다른 곳으로 이장(移葬)하게 함으로써 공의 병이 낫기를 바랐다. 대체로 공을 위해서라면 해주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품계도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올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