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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충정공(휘인옥)묘비명
[2012-04-14 16:35:15]



조인옥 [ 趙仁沃 ]의 비명(碑銘)



 



 




 


저자 정인지(鄭麟趾)


자 : 군계(君啓)


시호 : 충정(忠靖)


 



공의 성(姓)은 조씨(趙氏)이고 휘(諱)는 인옥(仁沃)이며, 자(字)는 군계(君啓)이고 본관(本貫)은 한양(漢陽) 사람이다. 고조(高祖)는 조지수(趙之壽)인데 육진(六鎭)에 들어가 비로소 용진(龍津) 사람이 되었고, 증조(曾祖)는 조휘(趙暉)로 쌍성 총관(雙城摠管)을 지냈다. 조고(祖考)는 조양기(趙良琪)로 부친의 관직을 세습하였는데, 원(元)나라 세조(世祖)가 주사(舟師, 해군(海軍)을 말함)를 출동시켜 동쪽의 일본을 정벌하면서 고려에 명하여 군대를 지원하도록 하니, 총관(摠管, 조양기를 말함)의 나이가 그 당시 13세였는데 충렬왕(忠烈王)에게 아뢰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출정하였다가 군대를 온전하게 하여 돌아왔으며, 합단(哈丹)의 군대가 철령(鐵嶺)을 넘어 도망하다가 쌍성에 이르자 총관이 그들을 노획(虜獲)하여 스스로 원나라 세조에게 바쳤다. 당시 총관의 나이가 21세였는데, 원나라 황제가 “이 사람은 장사(壯士)이다.”고 하고서 금포(錦袍)와 옥대(玉帶)를 하사하였다. 충렬왕이 또 그의 계책을 써서 등주(登州)의 잃어버린 땅을 41년 만에 비로소 수복(收復)하였다.


 



공의 부친은 조돈(趙暾)으로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는데, 공민왕(恭愍王) 때에 화주(和州) 등의 옛 강토(疆土)를 수복한 것은 그에게 힘입은 것이 많았다. 홍두군(紅頭軍, 홍건적(紅巾賊)을 말함)이 기병(起兵)하자 천하가 감히 그 예봉(銳鋒)을 감당하지 못하여 갑자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평양성(平壤城)을 함락시켰는데, 용성군이 원수(元帥)인 안우(安祐)를 따라 그들을 공격하여 패주(敗走)시켰다. 공민왕이 난리를 피하여 남쪽으로 가니, 용성군이 항상 궁궐에 숙위(宿衛)하는 군대를 관장하여 왕에게 신임과 중시를 받았다. 용성군은 평리(評理)에 추증된 이홍(李洪)의 딸에게 장가들어 원(元)나라 지정(至正) 정해년(丁亥年, 1437년 충목왕 3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선대(先代)의 훌륭함을 타고나서 태어날 때부터 보통 아이와 달랐고 매사를 배우지 않고서도 능히 해냈으며, 또 조금 자라서는 서사(書史)를 좋아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361년 공민왕 10년)에 처음으로 산원(散員)에 보임되었고, 이듬해에 낭장(郎將)으로 승진하였다. 대명(大明) 홍무(洪武) 병진년(丙辰年, 1376년 우왕 2년)에 중랑장(中郞將)에 올랐고 두 번 호군(護軍)으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비순위(備巡衛)와 감문위(監門衛)의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한 뒤에 사복시(司僕寺)와 전의시(典醫寺)의 판사(判事)로 개임(改任)되었다. 비록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였으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므로 사대부와 선비들이 평소에 그 소문을 듣고 공에게 종유(從遊)하는 자들이 많았다.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공이 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과 더불어 태조에게 ≪통감(通鑑)≫을 진강(進講)하였고, 무진년(戊辰年, 1388년 우왕 14년)에 고려의 폐주(廢主)인 신우(辛禑)가 절위(竊位)하여 망녕스럽게 군대를 출동시켜 요동(遼東)을 공략하였는데, 그 당시 우리 태조가 우군 도통(右軍都統)이 되었다. 태조가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의로운 군대를 거병(擧兵)할 때 공이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전택(田宅)을 하사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389년 공양왕 원년)에 좌대언(左代言)이 되어 왕명을 출납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390년 공양왕 2년)에는 전법 판서(典法判書)로 옮겼는데,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부녀자들이 절에 가는 것을 금지하도록 건의하여 마침내 영구한 제도가 되었다.


 



임신년(壬申年, 1392년 공양왕 4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승진하였는데, 그해 가을 7월에 태조가 흥운(興運)하여 개국(開國)하자 공이 한두 대신과 더불어 대의(大義)를 수창(首唱)하여 똑같은 의견으로 태조를 추대하였다. 그 공로로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임명되고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으며, 가정 대부(嘉靖大夫)로서 순충 좌명 개국 공신(純忠佐命開國功臣)의 훈호(勳號)가 내려졌다. 태조께서 일찍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남은(南誾)과 조인옥(趙仁沃)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 대업(大業)을 성취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그해 10월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노숭(盧崇)ㆍ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경사(京師)에 갔다. 이듬해 3월에 돌아오다가 평양(平壤)의 삼상(三湘)에 이르러 대동강(大同江)에 배를 띄우고 놀았는데, 삼봉 선생(三峰先生, 정도전을 말함)이 강지수사1)(江之水詞)를 읊어 그 뜻을 스스로 표현하자 공이 붓을 쥐고서 그 발사(跋辭)를 썼는바, 글이 매우 전아(典雅)하고 아름다웠으므로 삼봉 선생이 크게 칭탄(稱歎)을 해주었다.


 



공은 말씨가 어눌하고 풍채가 위려(偉麗)하였으며 태도가 엄격하고 장중(莊重)하여 사람들이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였다. 헛된 말을 하지 않고 기쁨이나 노여움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 조리(操履)의 고상하고 견고함이 남들보다 매우 뛰어났다. 또 조정에 벼슬할 때 응대(應對)하는 재능이 있어서 매양 조정에 사신이 올 때마다 공이 반드시 접반(接伴)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394년 태조 3년) 3월에 병에 걸려 오랫동안 낫지 않아 3년이나 앓으니, 태조께서 의원을 보내 문안하게 하는 일이 잇달았으며, 특별히 신기(神祇, 귀신(鬼神)을 말함)에게 기도하도록 명하였고 또 장사(葬師, 지관(地官)를 말함)로 하여금 고비(考妣)의 묘소를 다른 곳으로 이장(移葬)하게 함으로써 공의 병이 낫기를 바랐다. 대체로 공을 위해서라면 해주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품계도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올려주었다.


 



병자년(丙子年, 1396년 태조 5년) 9월 기사일(己巳日)에 별세하니, 향년은 50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태조께서 몹시 슬퍼하여 조회를 중지하고 치제(致祭)하였으며 충정(忠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다. 그달 신미일(辛未日)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양주(楊州)의 노동(蘆洞)에 장사하게 하였다.


 



오호(嗚呼)라, 공의 재능과 덕망으로써 나라의 원훈(元勳)이 되었으나 하늘이 오래 살게 해주지 아니하여 태평한 세상에 크게 베풀 수 없도록 하였으니, 애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영락(永樂) 경인년(庚寅年, 1410년 태종 10년) 가을 7월에 태조를 종묘(宗廟)에 부사(祔祀)할 때에 태종(太宗)께서 공의 개국(開國)을 도운 공훈이 커서 이화(李和)ㆍ이지란(李之蘭)ㆍ조준(趙浚) 등과 동등하다고 여기어 묘정(廟庭)에 향사(享祀)하였다. 또 어느 날 태종이 공의 조카인 조온(趙溫)에게 이르시기를, “경(卿)의 숙부(叔父)인 인옥(仁沃)은 현비(顯妣)의 인아친2)(姻婭親)이니, 만약 무인년(戊寅年, 1398년 태조 7년)의 변고를 만났다면 마음가짐이 크고 확고하여 반드시 나를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셨으니, 공의 시종(始終)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이러쿵저러쿵 논할 것이 없다.


 



공의 백형(伯兄)인 조인벽(趙仁璧)은 태조의 자서(姊壻, 누님의 남편을 말함)로서 전벌(戰伐)의 공로가 많았고 벼슬이 삼재(三宰, 참찬(參贊)을 말함)에까지 올랐는데, 공보다 앞서 별세하였다. 그 아들인 조온(趙溫)은 한천군(漢川君)에 봉해졌고 조연(趙涓)은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으로 한평군(漢平君)에 봉해졌는데, 모두 공신(功臣)들이다. 공의 차형(次兄)인 조인경(趙仁瓊)은 검교 찬성(檢校贊成)이고 그 다음 형인 조인규(趙仁珪)는 검교 한성(檢校漢城)이다. 그러므로 공의 종족(宗族)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집안이다.


 



공의 둘째 아들인 참의(參議) 조자(趙齎)는 일찍이 정통(正統) 무인년(戊寅年, 1446년 세종 28년) 봄에 죽었다. 맏아들인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조뢰(趙賚)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관(趙貫) 두 조공(趙公)이 나에게 청탁하기를, “우리 선고(先考)께서 공훈이 맹부(盟府)에 있어서 자손들이 복경(福慶)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50여 년 동안을 길이 사모하였는데, 묘비를 아직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제 비석을 이미 갖추었으니, 어찌 그대의 손을 기다린 것이 아니겠소.”라고 하였다. 나는 외람되게 공의 먼 인척이 되었으니 감히 글재주가 변변찮다고 사양할 수 없어서 말하기를, “한산군(漢山君)의 공훈과 사업은 국사(國史)에 모두 쓰여 있으니, 어찌 군더더기를 덧붙일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석실(石室)의 금궤(金櫃)에 비장(秘藏)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살펴볼 수 있으리오.”라고 하고서, 이에 감히 그 대략을 간추려 쓰고 명(銘)을 짓는다. 공의 아들과 손자들은 비석의 음기(陰記)에 별도로 기술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용(龍)이 해동(海東)에서 날아오르니 뛰어난 인물들이 붙좇고 따랐네. 이름이 죽백(竹帛)에 드리우고 공훈이 사직(社稷)에 있으니, 한(漢)나라의 소장(蕭張, 소하(蕭何)와 장량(張良)을 말함)이요 당(唐)나라의 배유(裵劉, 배도(裵度)와 유안(劉晏)을 말함)일세. 훈업(勳業)이 우뚝하게 뛰어나서 벼슬이 공후(公侯)의 반렬일세. 학문은 고금을 통달하여 재주가 족히 세상을 경륜(經綸)하였네. 어째서 오래 살지 못하여 백성에게 끝까지 베풀지 못하였나? 성덕(盛德)에 대한 보답은 후손들의 복경(福慶)으로 징험되니, 자손들이 길상(吉詳)하여 복록(福祿)을 받았네. 고상한 풍도를 만인이 우러르니 산하(山河)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고, 태실(太室)에 종향(從享)되니 천추 만세에 전해지리.



 


각주


1) 강지수사(江之水詞) : 문하시랑(門下侍郞)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노숭(盧崇)ㆍ조인옥(趙仁沃) 등과 중국에 사행에서 돌아오다가 대동강에서 평양 부윤(平壤府尹) 등과 더불어 뱃놀이를 할 때에, 술이 얼큰해지자 산천의 아름다운 풍광을 구경하면서 개연(慨然)한 심정을 읊어 소회(所懷)를 나타낸 글임. ≪삼봉집(三峰集)≫ 권2.


2) 현비(顯妣)의 인아친(姻婭親) : 조인옥(趙仁沃)의 맏형인 조인벽(趙仁璧)은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비(妃)가 낳은 정화 공주(貞和公主)를 아내로 맞았으므로 태조(太祖)에게는 자부(姊夫)가 된다. 또 조인옥의 증조(曾祖)인 조휘(趙暉)의 딸이 도조(度祖) 이춘(李椿)의 둘째 부인이므로, 이중으로 인척(姻戚) 관계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