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유물

home HOME > 유적과문헌 > 유적유물


가천재공파영천입향조(9세조문림)
[2012-03-12 12:07:08]




 



 



 



 



 



 



 




 



 



 



조문림(趙文琳, 號:紫溪)


자계정(紫溪亭)은 조선 중종 시대의 학자이며 참봉을 역임한 조문림(한양인, 가천재공 현감공파 9세,호:자계, 配:경주손씨)이 그의 종친인 조광조 선생(한양인, 10세)이 기묘사화로 참화를 당하자 이곳으로 피신하여 두문불출하며 경학을 연구하며 강론한 곳으로서,  임진왜란 때는 그의 후손 조종대(13세, 호:紫巖)가 임고서원에 봉안되여 있던 포은 선생의 영정과 향교 5성위의 위패가 잠시 피난한 곳이기도 하다. 4년 뒤인 정유재란에는 장항(獐項) 명상곡(明爽谷)에 숨겨 졌으며 이듬해 원각촌사(圓覺村舍)로 옮겨 봉안했다.(임고서원 원지에 보면 임진년 4월에 왜구가 침입하여 심히 급한 시기에 사인 이현남이 선생의 영정을 자양 성혈사로 옮겼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듬해는 자계 조종대의 계정(즉 지금의 자계정)으로 옮겨 모셨다가 4년 뒤인 정유재란에는 장항 명상곡에 숨겨졌으며 이듬해 원각촌사로 옮겨 봉안하다가 1600년 옛터에 초가 1칸을 지어 봉안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년만에 도일동에 임고서원을 다시 지어 영정을 옮겨 모셨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성혈은 영천을 상징하는 포은 선생의 영정과 향교 오성위의 위패를 보존케 해준 성스러운 곳이라 하겠다. ) 조문림은 한양조씨 가천재공-현감공파 영천입향조(9세)이다.  현재의 건물은 후손들이 추모하여 세운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 지붕이며, 좌측 2칸, 우측 1칸의 방과 사이에 대청이 있고 전면에 쪽마루를 달았다.


 


(妻父)장령공 유사
경주인, 공의 성은 손이요, 휘는 욱(旭)이다. 자는 모(某)인데 계성군 휘 사성(士晟)의 장자이시다. 이상의 세계는 모두 계성군 묘갈문에 실려 있다.계성군이 능히 고을에서 분기하여 우뚝하게 수립 되었기에 사대부의 바라는 바가 되셨고 서사가 거정(徐四佳居正)선생이, 선생이라고 높이며 섬기셨다. 공은 젊어서부터 가정 교육에 유념되어 문학이 일찍부터 성취되었고, 경태계유(景泰癸酉=端宗元年 서기 一四五三)년에 현량과에 올라가서 괴원(槐院=及第)에 선발되고, 여러 번 옮겨서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고, 성품이 곧다는 소문이 있었다. 일찍이 경산군수가 되어 심히 드러나게 다스린 공적이 있고, 명환록(名宦錄)에 부지런하고 삼가며 법을 봉행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해(丁亥=世祖十三年 서기 一四六七)년 여름에 반역자 이시애(李施愛)가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조정에서 공으로 어사를 삼고 적정을 염탐하여 보고하게 하니 공이 위험한 곳도 피하지 아니하고 명령을 받고 함흥에 이르렀다가 난중에서 순절하니, 사람들이 의사라 하였다. 그때 아우 계천군 휘 소(昭)가 교리로서 정북 원수의 막부의 보좌관이 되어 훌륭하게 작전을 세워 반란한 적을 섬멸하고 시체를 찾아 고향 산천에 돌아와 장사하니, 묘가 영천의 북쪽 방면 자양현 노루미기 명상동에 있고, 배위는 영천김씨(永川金氏)인데 묘는 동원이다. 아들이 없고 다만 따님 셋만 있어 맏딸는 참봉인 조문림(趙文琳)에게 출가하여 양자로 임(恁)이 있고, 다음은 진사인 이양(李陽)에게 출가하여 다섯 아들을 낳으니 손형(遜亨)은 찰방이요 겸형(謙亨) 시형(始亨) 복형(復亨)은 진사며 숙형(叔亨)도 진사다. 끝은 진사인 박빈(朴璸)에게 출가하여 아들 둘을 낳으시니 윤수(允秀)는 진사요 윤창(允昌)도 진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