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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정암 조광조와 능주의 적려유허지(추모비와 영정각, 애우당)
[2008-09-12 22:32:14]




문정공 정암 조광조와 능주의 적려유허지(추모비와 영정각, 애우당)


 


초가지붕 아래로 미끄러지던 햇살이 추녀 밑으로 뚝 떨어지면서 바닥에 그늘과 양지를 뚜렷하게 구분해놓는다.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처럼 거기 역사의 명암이 가로누워 있다. 초가집 그늘 안, 추녀로 가려진 상단 벽에 ‘적중거가(謫中居家)’라는 조그만 현판이 붙어 있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유배생활을 할 때 기거하던 처소다. 방 두 칸, 부엌 한 칸의 세 칸짜리 초가집으로 유배 당시의 누옥을 재현하여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성큼, 초가지붕 아래로 들어서서 안마당을 내다보던 내 눈길에 가장 먼저 잡혀온 것은 잔디밭 가운데 서 있는 정원수였다. 그래, 저기 저 자리쯤에서 조광조는 사약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그가 사약 한 사발을 마시고도 죽지 않자, 금부도사는 군졸들로 하여금 목을 졸라 죽이라고 명했다고 한다.

바로 그때 조광조는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잠깐 멈춰라! 성상께서 나의 목이나마 보존케 하려고 사약을 내리신 것인데, 너희들이 어찌 함부로 내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 어서 사약 한 사발을 더 가져오너라!”

그 소리에 놀란 금부도사는 군졸들로 하여금 사약 한 사발을 다시 가져오게 하였고, 조광조는 단숨에 그것을 비우고 피를 쏟으며 절명하였다고 한다.

38세의 아까운 나이로 이슬처럼 생을 마감한 조광조. 사약 한 사발로는 모자라 두 사발을 마신 후에야 절명할 정도로,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강하면 부러진다고 했던가, 조광조를 생각하면 강직한 선비의 기개(氣槪)가 먼저 가슴 저리게 떠오른다.



조선조 성종 13년(1482)년에 태어난 조광조는 17세 때 아버지가 어천도(魚川道:지금의 평안북도 영변) 역참 찰방으로 갔을 때, 당시 평안도 희천(熙川)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에게 글을 배워 사림파(士林派)의 학통을 이었다. 사림파는 고려 말의 정몽주와 길재의 성리학을 이어받은 학통으로, 길재의 동향 사람인 김숙자(金叔滋)가 그 맥을 어어 아들인 김종직(金宗直)에게 전였다. 그리고 김종직은 김굉필을 제자로 두어 계속 학맥을 이어나갔다. 이 학맥을 이어간 대표적인 인물들을 볼 때, 모두가 강직한 성품으로 정의와 의리를 숭상하는 학풍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광조의 집안도 정의와 의리를 숭상하는 강직한 전통을 갖고 있었다. 조부의 경우 수양대군이 계유정란(系酉靖難)을 일으켰을 때 반대파로 몰려 10년간 유배를 살았으며, 숙부 역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유배당한 바 있었다.

원래 불의를 용서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을 타고난 데다 이러한 전통적인 반골 기질의 분위기에서 자란 조광조는, 오래 전부터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을 마음속으로 흠모해오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를 따라 임지인 어천도로 가게 되자, 그는 희천에 유배와 있던 김굉필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조광조는 아버지를 졸라 소개장을 가지고 김굉필을 직접 찾아가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당시 김굉필은 무오사화로 김종직을 위시한 사림들이 사형 또는 유배 등으로 몰락할 때 희천으로 유배된 몸이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을 듣고 주변에서 제자들이 찾아와 그는 유배지에서도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김굉필의 문하로 들어간 조광조는 곧 스승이 가장 아끼는 제자가 되었다. 그후 김굉필이 다시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효수(梟首)를 당하고 나자, 조광조는 명실상부한 사림파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조광조는 스승 김굉필이 참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터져 나오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후 고기를 멀리하고 한동안 웃는 일이 없었으며, 참형을 당할 때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던 스승의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아 더욱 그를 마음속으로 떠받들게 되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11년 후인 중종 10년(1515) 가을, 조광조는 알성시에 급제하면서 본격적인 벼슬길로 들어섰다. 그는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등을 거쳐 중종 13년에 마침내 대사헌이 되었다. 이런 빠른 승진은 그가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하고 욍위에 오른 중종은 개혁정치를 펴게 되었는데, 그때 개혁의 주역으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신진 사류의 대표적인 인물인 조광조였다. 그는 스승 김굉필로부터 물려받은 성리학의 학통을 이어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왕도정치를 위해서는 부패와 비리를 청산하는 개혁이 필수적이었고, 따라서 그는 소격서(昭格暑)를 철폐하고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는 등 혁신적인 정책을 펼쳐나갔다.

소격서는 하늘과 산천, 별자리 등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왕실의 병을 낫게 하고 나라에 가뭄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관청으로, 유교적 입장에서는 마땅히 배격해야 할 미신이었다. 또 현량과는 기존의 과거제도와는 달리 추천에 의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방식으로, 유능한 신진사류들을 정계로 이끌어 들이기 위한 제도였다.

이러한 개혁 정치는 기존의 훈구세력에게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특히 현량과 실시로 인한 신진사류들의 등장은 훈구세력들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훈구세력들의 반발에 결정적으로 불을 당긴 것은 반정 당시 정국공신들에 대한 훈적삭제(勳籍削除) 사건이었다. 조광조는 부당하게 정국공신으로 책정된 100명이 넘던 사람들 중에서 4분의 3을 가려내어 공신 칭호와 토지 및 노비를 몰수해야 한다고 왕에게 주청을 올렸다.

이렇게 되자 훈구세력들은 일대 위기를 느끼고 조광조 일파를 몰아내기 위하여 작전을 짰다. 당시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세력들은 대궐 안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씨를 써서, 이를 벌레가 파먹게 하였다. 즉 ‘주(走)’와 ‘초(肖)’를 합하면 ‘조(趙)’가 되는데, 그 뜻은 ‘조씨가 왕이 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그들은 중종에게 상소를 올려 ‘조광조가 반역의 뜻을 품고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마침내 중종은 훈구세력의 손을 들어주었고, 조광조를 비롯한 김정(金淨), 김식(金湜), 김구(金絿) 등 사림파들은 일거에 축출되었다.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였다.

원래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은 참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당시 성균관 유생들의 시위와 격렬한 상소가 잇달아 유배형이 내려졌다. 이때 조광조는 전라남도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

조광조는 능주의 한 민가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제자 장잠(張潛)이 따라와 함께 기거하여 그리 적적하지는 않았다. 또한 능주 출신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물러난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0~1545)이 고향에 내려와 있어 간간이 말벗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이 홀로 시간을 보낼 때면 조광조는 괴로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는 유배 당시의 괴로운 마음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누가 화살 맞아 상처난 새의 신세 가련히 여길까(誰憐身似傷弓鳥)
말 잃고 허전한 늙은이 같은 마음 스스로 웃노라(自笑心同失馬翁)
원학은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성화를 해대지만(猿鶴正嗔吾不返)
복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豈知難出伏盆中)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라는 제목이 붙은 이 시는 조광조가 홀로 마음이 괴로울 때 읊은 것이다. 이때 그는 자신을 ‘화살 맞아 상처난 새’로 비유하였으며, 또한 졸지에 정계에서 쫓겨난 자신을 ‘말 잃은 늙은이’의 심정에 빗대고 있다. 그리고 ‘원학’은 ‘원숭이와 학’을 이르는 말로 군자를 비유한 고사에서 따온 것이며, ‘복분’은 즉 ‘엎어진 질그릇’이란 뜻으로 정적들에 의해 억울한 모함을 받은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광조의 유배 기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유배생활 한 달 만에 그는 중종이 내리는 사약을 들고 온 금부도사와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금부도사 유엄(柳渰)이 사사(賜死)를 명하는 어찰(御札)을 전했을 때, 그는 북쪽(한성)을 향해 절을 올린 뒤 땅에 꿇어앉아 조용히 물었다.

“지금 누가 정승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금부도사는 남곤이 좌의정이고, 심정은 의금부 당상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조광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죽는 게 틀림없군!”

조광조의 이 말은, 어명보다 간신들의 농간에 의해 자신이 사약을 받게 되었음을 깊이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쩔 수 없이 사약을 받아야 할 운명이라는 걸 알게 된 조광조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새 옷을 갈아입고, 제자 장잠으로 하여금 지필묵을 준비하라 일렀다. 곧 그의 손끝에서는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가 붓을 타고 흘러 나왔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愛君如愛父)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憂國如憂家)
밝은 해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白日臨下土)
거짓 없는 이내 정성을 환하게 비추리라(昭昭照丹衷)


조광조는 이 시를 쓰고 나서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관으로 쓸 나무을 얇은 것으로 하라. 두껍고 무거운 송판을 쓰면 먼 길 가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곧바로 마당으로 나가 땅에 무릎을 꿇고 사약을 받았다. 때는 12월이어서 겨울 해가 짧았고, 석양으로 기운 해가 붉은 기운을 마당 한 가운데 피처럼 토해내고 있었다.

그 마당 한곁으로 영정각(影幀閣)이 보였는데, 조광조의 초상이 안치된 이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영정각을 뒤로 하고 다시 들어왔던 문을 통해 나오면 관리 사무실 건물이 있다. 관리인은 보이지 않고 널찍한 마루와 벽에 걸린 편액들이 당시 조광조의 발자취를 증거하고 있다. 이 편액에는 그가 쓴 ‘절명시’, 유배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올린 ‘상소문’, 유배 와서 자신의 심정을 읊은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 등이 적혀 있다.

관리 사무실 건물 마당에서 왼쪽을 쳐다보면 문이 하나 더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면 ‘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靜庵趙光祖先生謫廬遺墟追摸碑)’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이 추모비는 현종 8년(1667) 당시 능주 목사 민영로가 세운 것으로, 뒷면에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문이 동춘 송준길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조광조의 유배지는 그가 불과 한 달 가량 머물다 사사됐기 때문에,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소재의 ‘적려유허지’밖에 없다. 남정리는 능주면 소재지이기도 해서 조광조 유배지와 민가가 붙어 있으므로 경치는 별로 볼거리가 못된다.

그러나 조광조 유배지 답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정리에서 이양면 쪽으로 불과 1킬로미터도 안 되는 곳에 죽수서원(竹樹書院)이 있는데, 이 서원은 조광조를 추모하는 제사를 받들어 모시기 위해 1579년에 설립되었다. 보성 쪽에서 화순으로 들어오자면 능주 입구의 오른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조광조보다 6세 아래였으나 학문을 교류하며 친구처럼 지냈던 양팽손이 이곳에 초분을 지어 조광조의 시신을 1년간 모셨다고 한다. 사사된 지 1년 후 조광조의 시신은 이곳에서 경기도 용인의 선영으로 옮겨져 묘소에 안장되었다. 아무튼 그 후 죽수서원은 조광조와 양팽손의 신위를 모시는 곳이 되었으며, 서원 건립 당시의 왕인 선조(宣祖)가 직접 현판 글씨를 써서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죽수서원은 그 이름처럼 울창한 대나무숲 가운데 건립되었으며, 마당 한 켠에는 지금도 당시 세웠던 정암과 학포를 기리는 돌로
된 비석이 조그맣게 서 있다.


 



 



 



 



 



 



 



 



 



 



 



 



 



 



 




 



 



 



 



 



 



 



 



 



 



 



 



 



 



 



 



 



 




 



 




 



 



 



 



 



 



 



 



 




 



 


<영벽정 물버들/박응식作>
강 수면에 늘어진 잎이 조심스럽게 맛보는 물빛이 푸르다.
밑둥치가 푸르러서 물이 푸른지
물빛이 푸르러서 밑둥치가 푸른지
푸르딩딩한 이끼 낀 잠긴 발이 하늘빛과 섞여진다.
풀풀하게 날리는 푸름이 간간히 오가는 사람들 뒤 꼭지를 따라간다.
연주 산에 걸린 구름 
정자 현판에 오래된 이야기가 파란 바람에 날린다.


 


영벽정이란 계절따라 변모되는 연주산의 경치를 맑은 지석강물에 투영되어 운치있게 바라볼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연주산 아래 지석강의 상류 영벽강변에 있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경승지에 있기 때문에 행락객들이 널리 이용하고 있다.


2층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형이다.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양팽손 등이 쓴 제영으로 보아 조선 명종때나 선조때(16세기 후반)인 것 같다. 건립자는 능주목(군), 즉 관청이 건립의 주체였었다고 생각된다. 인조의 모후인 인헌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목사골이 되고 목사 정윤이 아전들의 휴식처로 정자를 개수하였다고 한다. 후일 고종 9년(1872)에  화재로 인해 소실됨에 따라 다음해인 1873년 계유에 능주목사인   한치조가 중건하였고, 1920년 군민의 출연으로 중수하였다.

정자 안에는 9개의 현판이 있다. 기단위에 주춧돌을 넣고 원형기둥으로 세웠다. 이 기둥 위에 마루를 깔아 중층 누각형 정자를  만들었다. 마루의 사방에는 계자 난간을 돌려 장식하였고 처마밑에는 활주를 세웠다. 누 위의 기둥머리에는 익공형식의 공포를 하였고 천정은 연등천정이나 중앙부는 우물천장을 설치하였다. 지붕을 3겹으로 한 것은 아주 보기드문 예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