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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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가천재공 사

충효(忠孝)와 절의(節義)의 백세사표(百世師表)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이군불사(二君不事)’정신. 시대와 관점에 따라 이를 평가하는 시각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정치철학이나 소신보단 자신의 안위와 눈앞에 놓인 이익을 좆는 이 시대의 많은 정치인들에겐 적어도 귀감이 되는 한 역사인물이 있다. 임종을 하면서까지 “내가 죽거든 포은총(圃隱塚)이 가까운데 묻어 지하에서나마 따라 놀 수 있게 하라”하여, 죽어서도 평소 존경하던 포은 정몽주 선생 곁에 잠들어 있는 가천재(嘉川齋) 조사(趙師)가 그다.





 

 


가천재공휘사조선생신도비명 병서(嘉川齋公諱師趙先生神道碑銘竝書) 

이씨 조선<李韓>의 처음에 가천재 조선생(嘉川齋趙先生)이 있었으니, 휘는 사(), 그 선대(先代)는 한양 사람이다. 시조 지수(始祖之壽)는 고려에서 첨의 중서사(僉議中書事)로 이 분이 휘()를 낳았으니, 쌍성총관(雙城摠管)이고, 총관이 양기(良琪)를 낳았으니 총관을 습작(襲爵)하고, 이 분이 돈()을 낳았으니 예의판서 용성부원군(禮儀判書龍城府院君)이오, 이 분이 인벽(仁璧)을 낳았으니, 보리공신용원부원군(輔理功臣龍原府院君)인데 고려의 운수가 다 한 것을 보고, 양양시상촌(襄陽柴桑村)으로 은퇴(隱退)하여 망복(罔僕)의 절의(節義)를 지켰으니, 후일에 추증하여 한산백(漢山伯)을 봉하고 시호를 양렬(襄烈)이라 하였으니, 이 분이 가천재공에게 아버지가 된다.

 

()는 정화공주(貞和公主)로서 선생은 처음부터 이태조의 친생질(親甥侄)이니, ()에 의하여 통정대부 중추원사(通政大夫 中樞院事)에 재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양양(襄陽)으로 돌아가 조정에서의 여러번 초빙을 거절하고 나가지 않고 늙어서 마쳤다.

 

일찍이 원운곡 천석(元耘谷天錫)과 더불어 공양왕(恭讓王)을 호위(護衛)하고 있었기에, 교분이 가장 친밀하여 가치천(嘉致川) 위에서 초연하고 자유롭게 지내면서 스스로 호()를 가천재(嘉川齋)라하고 노닐던 대()를 와선대(臥仙臺)라 하였다.

 

임종할 때 (자손들에게) 일러두기를,

[내가 죽거든 마땅히 포은(圃隱 : 鄭夢周)의 묘소 근처에 묻어서 지하에서라도 따라 노닐게 해달라.]

 

라고 하여 마침내 유명(遺命)을 준행(遵行)하여 용인 능곡(龍仁陵谷)의 오향의 언덕을 벼개로 장사하였으며, 후일 양렬공(襄列公)을 향사하는 충현사(忠賢祠)에 배향(配享)하였다.

 

()는 숙부인 언양김씨(淑夫人彦陽金氏)니 대사헌 계생(大司憲繼生)의 딸이다. 묘소는 같은 언덕이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맹발(孟發)은 현령(縣令)이오, 중발(仲發)은 현감(縣監)이오, 계발(季發)은 녹사(錄事). 맹발의 아들은 승원(承源)이고, 손자는 위()니 모두 군수(郡守). 중발의 아들 민()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의(執儀)이고, ()은 도사(都事), ()은 군수요, ()은 사용(司勇)이요, ()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인데 이 분이 계대(系代)를 이었으니, 그 후손에 고관과 학자가 대대로 이어 <대강 추려도> 문숙(文琡)은 문과한림(文科翰林)이고, 문림(文琳)은 침랑(寢郞). 문거(文琚)는 세마(洗馬), 광언(光彦)은 문과응교(文科應敎), ()은 사성(司成)이며, ()는 수의(修義), ()은 교위(校尉), ()은 증좌찬성시정익(贈左贊成諡貞翼)이며, 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