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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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문절공 원기

9세 문절공 휘 원기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 연산군에 사초(史草) 열람거부로 파직, 유배 명신록(名臣錄)에 오르고 청백리에 뽑혀 한양조씨 최초의 족보인 갑신단권보 편찬 공(公)의 휘는 원기(元紀), 자는 이지(理之), 호는 돈후재(敦厚齋)이다. 조선조의 개국(開國) 정사(定社) 좌명(佐命)공신인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양절공(良節公) 휘 온(溫)이 증조부요, 이조참판에 증직된 의영고사(義盈庫使) 휘 육(育)이 조부요, 예조판서에 증직된 성균관 사예(司藝) 휘 충손(衷孫)이 부이다. 판서공이 남상명(南尙明)의 따님에 장가들어 1457(세조 2)년에 공을 낳았다. 공이 9살 때 장기를 두고 놀이에만 치중하자 어머니로부터 한탄하는 말을 듣고 반성한 뒤 학문에 정진하여 1483(성종 14)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공은 학문을 함에 있어 이치(理致)와 경의(經義)를 깊이 탐구하고 사장(詞章)을 일삼치 아니하였으며 문장을 함에는 반드시 자기적인 창의에서 나오고 옛 사람의 한 마디 말도 그대로 쓰는 법이 없었다. 1496(연산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수찬(修撰), 봉상시(奉常寺) 첨정(僉正), 경원부사(慶源府使), 대사간(大司諫), 좌부승지(左副承旨),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절사(聖節使),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 형조판서(刑曹判書),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을 지냈다. 1500(연산군 6)년 여름 평안도 변경(邊境)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해랑도(海浪島)에 들어가 소굴(巢窟)의 적(籍)에 오르고 사세(事勢)가 장차 점점 오만하여 염려가 중국에까지 미치게 되었을 때 공이 부장(副將)으로 그들을 붙잡아 데려왔다. 임금이 감탄하고 아름답게 여기어 칭찬하기를 오래하다가 숭정(崇政)의 계직(階職)으로 특진(特進)시킬 것을 명하여 의금부(義禁府) 판사(判事)가 되었다. 공의 세 번 특명이 모두 청렴한 절조로써 포상을 받게되니 세상에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임금도 열람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사초(史草)를 연산군이 보려고 제출을 명하였으나 이에 불응하여 파직(罷職)을 당하고 유배(流配)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하여 두려워 하였으나 공은 움직이지 아니하였고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충효(忠孝)스럽고 절약하고 검소한 것을 좋아하였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모심에 홀로 여막(廬幕)에 거처하고 아침 저녁으로 슬퍼하며 3년을 여막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재상(宰相)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면서도 무너지는 집에 담장은 낮아서 겨우 비바람을 가리고 부엌에 있는 것이라곤 소금과 나물에 그쳐 남들이 이것을 보고 견디지 못해 하는데도 공은 즐거워하고 싫어하지 아니하였다. 사람이 한 물건을 보내옴에 조금이라도 마땅치 않으면 반드시 사양하여 받지 않고 마치 장차 자신을 더럽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니 그 평소에 밝게 행함이 그러하였다. 평생 맡은 바 국사에 성심을 다하여 비록 혹독한 추위와 성(盛)한 더위에도 일찍이 단 하루라도 휴가를 낸 적이 없으니 모든 동료와 관리들이 공을 보고서 부지런하다고 일렀다. 관속(官屬)들의 비용으로 쓰이는 물자가 집에 들어오면 봉해 두고 집에 들이지 아니하였다. 반드시 먼저 가난한 자매들을 돌보고 집안의 노인 과부 외로운 어린이에게까지 미치게 하여 집에서 스스로 보양할 것은 항상 넉넉지 못하였다. 관청에서 퇴청(退廳)해서는 항상 작은 서재(書齋)에서 서사(書史)를 죽 훑어 보고 해가 저물면 지팡이를 잡고 신을 끌면서 작은 못을 굽어 보기도 하고 두어 떨기 국화를 대하면서 읊조리고 거닐면서 마치 조물주와 더불어 벗하는 듯 하고 그 흉회(胸懷)가 호연하게 넓으니 공의 즐거움을 하는 것이 어찌 간결하고 소박한 것이 아니었던가. 공은 조카인 광조(光祖)의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 늘 이를 심히 근심하며 편지를 보내어 경계토록 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정암(靜菴)이 사사(賜死)됨에 충격을 받고, 승지공〔承旨公, 양경공파 10세조 휘 세정(世楨)〕과 함께 족보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한양조씨로서는 최초의 족보이며 우리나라의 민간 족보로는 제2호를 기록한 자랑스러운 갑신단권보(甲申單卷譜)이다. 1533(중종 28)년 77세를 일기로 타계(他界)함에 임금이 이를 슬퍼하고 아깝게 여기어 정원(政院)으로 하교(下敎)해 말하기를 「공의 청백(淸白)은 천성(天性)에서 나와서 늙도록 양(襄)하지 아니하니 진실로 가상하고 아름답도다.」하고 2일간 조회를 철폐하고 의례적인 부의(賻儀) 외에 특별히 면포(綿布)를 하사해서 장사와 제사에 쓰이게 하였으니 또한 근래에 없던 바이었다. 문절(文節)의 시호를 받고 명신록(名臣錄)에 올랐으며 조문절공유고(趙文節公遺稿)가 있다.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생질인 영상(領相) 홍언필(洪彦弼)이 묘비명(墓碑銘)을 지었다. 부인 금성인(錦城人) 나씨(羅氏)는 현감(縣監) 성손(誠孫)의 따님으로 공이 벼슬이 없는 선비 때로부터 공경해 섬기기를 어김없이 하여 능히 가난한 것을 평안이 여기고 담백한 것을 기뻐하였다. 자녀가 없어서 서자(庶子)를 어루만지고 정성껏 돌보니 일가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하계리에 합장하였었으나 화성시 봉담읍 세곡리로 옮겼다.

 

崇政大夫判義禁府

事文節敦厚齋漢陽

趙公元紀神道碑銘